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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에 살아요

할머니가 남겨놓고 가신 동독스타일 가구가 있는 겨울에도 따뜻한 집에 살아

by 조희진

- 너도 이 근처(베를린)에 살아?

- 아니 나 집은 포츠담이야.

- 포츠담? 집에 수영장 있어?

- 아니 나는 그런 집 아니야 그냥 아파트야.


베를린의 맛집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줄 서서 지인과 집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포츠담에 사는 얘기가 나왔다. 보통 어디샤냐는 질문을 받으면 '베를린 근교'라고 얘기하지만 베를린에 사는 친구들과 얘기할 때는 정확하게 '포츠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영장이 있냐는 질문처럼, 포츠담은 그런 인식이 있는 동네이다.


베를린에 직장이나 학교가 있어서 매일 출퇴근해야 하지만 시끄럽고 번잡한 시내보다는 자연이 많고 한적한 곳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하펜(강)이 흐르고 상수시궁전을 포함해 크고 쾌적한 공원이 많은 곳. 유명인의 별장도 곳곳에 있고 바베리니 Barberini나 다스 민스크 Das Minsk 같은 근사한 미술 박물관이 있으며 베를린과는 S-Bahn(지상전철)로 30분이면 오고 갈 수 있는 곳.

그리하여 포츠담이라 하면 정원이 있는 개인주택을 많이 생각하지만 우리 집은 동독식 고층 아파트이다. 독일에서 드물게 볼 수 있고 대체적으로 고층아파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서민이 산다는 인식이 있기도 한 그런 아파트.


몇 년 전 하노버에서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오며 집을 구할 때, 베를린과 근교의 포츠담 두 곳을 모두 찾았다. 월세 구하기가 워낙에 어려운 베를린이기에 가까운 포츠담까지도 둘러봤던 것인데 딱 하나 뷰잉초대를 받고 바로 계약할 수 있었던 운이 좋았던 집이다. 온라인으로 집을 검색하면서 8층에 위치한 집이라길래, 큰 기대 없었지만 사진에 얼핏 보이는 뷰가 예사롭지 않았다. 12월 한겨울 비바람이 부는 날 집을 보러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가본 독일 집중에 가장 따뜻했고 창밖으로 펼쳐진 뷰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당시에는 세입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난방을 가득 켰나 보다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중앙난방이라 한국처럼 따뜻해지는 집이었다. 독일 사는 사람을 잘 알 것이다. 겨울에도 따뜻한 집, 로또 당첨에 가까운 행운이라는 거.


내가 들어오기 전 이 집은, 90이 넘으신 할머니께서 30년 이상을 사시다 요양원에 들어가시면서 새로운 세입자를 찾게 된 상황이었다. 집을 보러 갔을 때, 할머니의 가족들은 식탁과 의자, 책장 등 필수적인 가구를 남겨둔 채 집을 정리한 상태였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남은 가구들도 깨끗이 치워주신다고 하셨지만 내가 사용하고 싶다는 요청에 그냥 남겨두셨다. 나의 가구라고는 침대밖에 없었으니 그렇게 우리 집은 할머니의 가구들과 접시 등이 남아 할머니께서 이사 들어오시던 90년대 그 무드 그대로이다.


동독 가구의 특징은 장식이 덜한 실용적인 디자인에 쉽게 만들 수 있는 합판소재가 많다. 사진 속 책장과 테이블, 의자가 모두 할머니께 받은 가구이다. 한창 핀 율 스타일의 가구를 좋아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크게 나무 가구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구를 모두 새로 사고 들이는 번거로움과 경제적 비용을 줄이고자 하다 보니 꽤나 따뜻하고 빈티지한 인테리어가 나도 모르게 완성되었달까.



이 집에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이렇게 혼자 월세를 내고 사는 게 효율적인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겨울엔 그 고민이 싹 해결된다. 이만큼 따뜻한 집 구하기 어려울 것이니 오래도록 여기 살자고 다짐하며 삶의 계획이 심플해진다. 이곳의 겨울은 옷을 두껍게 입는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어둡고 추운 집에서 아침에 눈을 겨우 뜨며 오늘 하루도 버티는 5개월의 시간이다. 의욕과 에너지가 사라지고 하루의 계획이 아주 기본적인 욕구만을 해결하는 것으로 근근이 채워지는 시간. 그래서 베를린사람들은 초를 많이 키는 것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싸늘하고 캄캄한 실내에서 작은 불꽃이 유일하게 따뜻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서.


해가 잘 들어오고 평균 실내 기온이 20도를 웃돌면 바깥은 비바람이 부는 어둠이어도 나갈 기운이 난다. 실내 헬스장이라도 갈까, 근처 전시라도 잠깐 보고 올까 하는 소중한 마음이 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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