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깨어나는 마음이 금방 시들지 않기를
이번 주 금요일에 하기로 했던 일과 관련된 미팅이 다음 주 수요일로 미뤄졌다. 이유인즉, 이번 주 금요일이 ‘너희들’에게는 공휴일이니까 다음 주 수요일에 보자며.
10월 31일 독일은 ’Reformationstag, 종교개혁의 날‘이다.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들어본 적 있는 ‘면죄부’를 마틴 루터가 반박하며 95개의 반박문을 교회 문 앞에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된 날로 공휴일인데 미팅 주선자는 왜 굳이 ‘너희들’에게는 공휴일이라고 한 걸까.
포츠담에 살며 베를린을 매일같이 오가는 나에게 포츠담이나 베를린이나 같은 동네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행정 구역상 정확히 나누고자 한다면 포츠담은 브란덴부르크 주이고 그 주의 수도이며 베를린은 독립된 하나의 도시이자, 독립된 주이다. 이해를 위해 쉽게 비교하자면 한국의 서울과 수원(경기도의 수도)이 된다. 독일 대부분의 휴일이 각 주마다 다르듯이, 10월 31일 종교개혁의 날도 브란덴부르크주에서는 휴일이지만 베를린에서는 평일이다. 원래 계획되었던 미팅이 진행되어야 하는 곳은 베를린에 위치한 사무실이었다. 거기 직원들에게는 그저 평일인 금요일인데, 그곳에서 미팅을 참여하는 사람들은 브란덴부르크에 사는 프리랜서가 있다 보니, 배려차원에서 ‘너희들에게는 공휴일이니 ‘ 다음 주 수요일로 미뤄준 것이다.
한국과는 다르게 주별로 공휴일이 다른 독일에서 십여 년을 넘게 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동네 문화와 관습을 더 알아갈수록 더욱 한국과의 다름이 실감 난다. 크게는 선거 방식, 공휴일의 규칙, 전기세와 수도세를 한국은 월간 계산되어 나오는 반면 독일은 연간 기준으로 계산되는 방식에서부터 작게는 주방의 행주나 주방 타월(한국에서는 굳이 마른 수건으로 접시를 닦는 일이 적으니 거의 필요 없는), 보통의 장 보는 습관들, 가족 간의 호칭과 예의,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말고의 여부 등등… 친구와 지인들은 이제 유럽사람 다 됐냐며 가끔 한국에 방문했을 때 나도 모르게 유럽식 습관이 나오면 핀잔처럼 놀리고는 하는데 사실 이곳의 삶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 스스로에게는 독일과 영원히 교집합이 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다행히도 웬만한 건 크게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성격 때문일까, 내가 보고 느끼며 알게 되는 이 문화차이가 방해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어쩜 이렇게 다를까 하는 신선함과 흥미로움이 더 컸다. 덕분에 분명 나에게도 인종차별이라고 여길만한 순간이 있었겠지만 나와 상관없는 이들이, 내 문화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차별해 봤자라는 생각으로 뒤돌아서면 잊어버렸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것에는 한 살 더 먹는 나이와 반복되는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것이 있다. 때로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 20대 후반까지 어학연수 한번 없이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 눈에 비친 유럽은 생경하기 그지없었으나 이제는 시간에 덮혀져 머리도 마음도 크게 반응하지 않는 익숙함이 되었다. 게다가 지난 몇 년 독일 회사원으로서 살다 보니 사용하는 언어와 동료들의 피부색만 다를 뿐 한국에서 회사원으로 살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 그 와중에 나이가 많아졌고 흥미가 생기고 마음이 가는 것이 딱히 없으며 남의 열정을 부러워하는 내가 되어있었다. 내가 유럽에 유학을 결정하며 생각한 내 미래의 모습은 나 자신을 잠시 접어두고 월급과 출퇴근에 올인하는 이 모습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니 나를 좀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 회사 다닐 땐 가장 중요한 ‘나’를 생각할 틈도 없이 지쳐있었고 어리석게도 월급으로 그나마 보상이 된다고 여겼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난 6개월 회사를 그만두고 익숙함을 넘어 무뎌지기까지 한 것들을 다시 둘러보기로 했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촉각을 세워 찾아보려 한다. 어제 오랜만에 비가 오고 추운 깜깜한 저녁을 뚫고 나가 베를린 미테의 KW 오프닝에 다녀오며 마치 동굴에서 나온 기분이었다. 이런 날씨에 오프닝에 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마감시간까지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할 만큼 사람이 많았고 막상 도착하니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KW는 베를린을 대표하는 예술 공간 중 하나로 베를린 비엔날레 주최이기도 한 유명한 곳인데 그동안 나는 ‘나도 다 안다, 굳이 안 가도 된다’라고 오만했었다. 마치 서울 살면 경복궁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런던 살면 런던아이 안타는 것처럼. 이제라도 정신을 좀 차려봐야 하겠다.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이던, 내 마음속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야 숨어있는 보석이 보일 테니까. 독일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살면 살수록 더 잘 보이는 독일과 한국의 차이점이 내가 가진 총알이 될 수 있도록 찬찬히 훑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