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와 도자기가 탄생할 때 반드시 거치는 것이 불이다. 각 재료의 특성에 맞게 1300도 이하, 1700도 이상 등으로 재료는 불덩이를 통과한다. 그 과정을 거쳐야 단단한 완성품이 된다. 그런데 그 불덩이를 통과한 재료들 조차 작은 충격에도 한 순간에 깨지기도 한다. 그래서 유리와 도자기로 만든 그릇은 조심히 다룬다.
신뢰도 유리와 도자기 같다. 신뢰를 쌓기까지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긴 반면, 무너지는 순간은 허무할 만큼 쉽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신뢰를 생각보다 쉽게 여긴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스(nice)함 만으로 신뢰는 형성되지 않는다. 신뢰는 수많은 기쁨의 순간보다 어렵고 힘든 순간 그 순도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본심이 드러난다.
회사 혹은 집안이 어려울 때,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낮은 위치에 있을 때처럼 모든 환경이 불완전하고 부족할 때, 관계의 신뢰는 더 명확해진다. 신뢰를 깨트리는 많은 요소 중에 하나로 거짓이 있다. 거짓은 횡령과 같은 큰 사안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거짓과 비일관성이 드러날 때, 그때부터 신뢰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사회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그 관계가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다. 하지만 계약 또한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철저한 계약 관계로 모든 것을 다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뢰는 더 중요하다. 아무리 철저한 문서상의 계약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신뢰와 믿음을 쌓을 수 없으며 얼마든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찾고, 필요 없을 때 버리는 관계에서는 상대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신뢰 또한 없다. 그래서 신뢰는 철저히 이성적인 관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하고, 기다려주기도 하며, 상대의 이익을 지지해주어야 하는 상황 가운데서 믿음의 깊이와 넓이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좋은 면을 보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잘 믿는 편이었다. 그 믿음에 대한 수많은 시행착오와 배신을 경험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하는 것에 한 표를 던진다. 다만,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뢰를 지키고 쌓을 수 있는 몇 가지 룰이 있었다. 먼저 뒤통수 맞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먼저 상대를 믿는 것이다. 둘째, 사람의 높고 낮음의 위치와 상관없이 태도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셋째, 어렵고 힘들 때 그 옆에 말없이 함께 있는 것이다. 넷째, 어떠한 경우에도 그 사람이 없을 때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상대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 다섯째, 약속을 어길만한 상황적 변수를 제외하고는 아주 사소한 약속이라고 해도 지키는 것이다. 여섯째,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이다. 일곱째, 가능한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대화하는 것이 좋다.
신뢰를 지키는 방법을 안다고 잘한다는 것은 아니다. 순간순간 망각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뢰에 금이 간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깨달았다. 신뢰를 내가 먼저 잃어버리기도 했고, 상대가 먼저 믿음을 져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깨져버린 유리가 다시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쉽지 않았다.
내가 신뢰하고, 누군가 나를 신뢰하는 양방향 믿음은 삶의 든든한 지지대가 된다. 설령 물질적인 도움이 오가지 않더라도, 정서적 신뢰는 사람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든다. 내가 누군가를 신뢰하든, 신뢰를 받든 그 사람을 좀 더 밝고, 긍정적이고, 열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학생을 가르쳐 보면 안다.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선생님이 자신에 대한 감정을 직관적으로 안다. 그래서 나를 좋아하는지, 믿어주는지, 인정하는 지를 말하지 않아도 느낀다. 학생을 믿고, 인정할 때, 그 아이의 학습능력은 향상된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의 신뢰가 전제된 태도와 언행이 가르치는 행위보다 중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살릴 수 있는 신뢰를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도 홀대해서도 안 된다.
Dear J
신뢰를 잃어버렸을 때, 그 감정을 기억하니? 그 감정은 어릴수록 더 기억에 깊게 남는단다. 그래서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도 신뢰를 받는 것만큼 중요하지. 사람들은 신뢰를 받고 싶어 하지만, 정작 상대를 신뢰하기는 쉽지 않지. 하지만 신뢰의 감정은 참 신비로워서 너의 신뢰는 상대도 너를 신뢰하게 만든단다. 물론 그 신뢰를 저버리는 사람들도 있어. 그렇다고 해서 네가 누군가를 불신한다면, 네 주변은 불신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렴.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신뢰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단다. 왜냐하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그 신뢰를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하기도 하고, 이해관계없이 돕기도 하잖니? 이러한 신뢰할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바로 내가 상대를 신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 물론 악한 자를 분별하는 능력은 있어야 하겠지. 세상이 악하다고 불신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나에게도 믿을만한 사람이 오지 않아. 그러니, 먼저 손을 내밀어 믿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