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 식탁에서였다.
아들은 그릇을 정리하다가 한국 도자기 접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엄마, 이 그릇 한 삼십 년은 되었겠죠? 그런데
이도 나가지 않고 지금도 새것처럼 깨끗하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사십 년도 더 됐지. 행남자기도 있는데, 너 업고 다닐 때 샀으니까 얼마나 오래됐겠니.”
문득 그 도자기 세트를 사던 날이 떠올랐다.
월곡동 창문여고를 지나 장위동 꼭대기 언니네
집에 갔을 때였다. 삼성전자 대리점이 이주를
하게 되어 행남자기를 저렴하게 판다며 언니가
흥정을 해 놓았다고 했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로봇 마네킹도 선물로 준다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아기를 업고 형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릇 박스를 가져갈 수 없겠다고 하자 대리점
사모님이 배달을 해 주겠다고 했다.
장위동에서 보문동까지,
차도 없고 리어카도 없던 시절이었다.
머리에 이고 다니던 때였다.
그렇게 구입했던 접시들이 지금도 우리 집 식탁 위에 올라온다.
가끔 그 사모님이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서 살고 계실까.
잘 살고 계시겠지.
물건 하나 팔겠다고 그 먼 길을 걸어 배달해 주시던 시절,
그 고생의 값이 얼마나 되는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사십오 년 전 나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살았다.
두고두고 미안하고 고마운 분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방에 박스 하나 놓고 살던 시절, 서랍장이 너무 갖고 싶었다.
그 무렵 미아리 부근에는 가구점 거리가 있었다.
그때는 웬만한 거리도 버스를 타지 않고 아기를 업은 채 걸어 다녔다.
아성가구에서 오 단 단스를 하나 샀다.
옆에 세워 둔 작은 장롱이 눈에 들어왔지만 값이 부담되어 단스만 사 가지고 돌아왔다.
리어카에 단스를 싣고 온 아저씨와 함께 보문동 집에 도착해 방에 들여놓고 나니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 더 값을 치르고 장롱을 살 걸 그랬다.
나는 다시 그 가구점으로 찾아가 교환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저씨는 흔쾌히 그 먼 길을 다시 리어카에 싣고 와 바꿔 주셨다.
고마운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땐 이런 인사도 드릴 줄 모르는 나였겠지.
아이들이 자라며 오랫동안 사용했던 조각 장식
장롱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 옛날 이야기가 줄줄 이어진다.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담담히 들으며
엄마가 아끼던 그릇들을 차곡차곡 씽크대 진열장에 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