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공책

무지의 모순

by 여슬

그깟 이백만 원을 아직 기억하냐고 묻는 T의 메시지를 보며 J는 두 가지가 명확해졌다. 이백만 원 앞에 '그깟'을 붙일 수 있는 T는 이제 경제적 상황이 좋아졌다 것과 그가 택한 단어 '그깟'에 여전히 매달려있는 J는 저 깊숙한 씽크홀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T에게 '그깟'이 되어버린 이백이 J에게는 여전히 '씩이나'라는 진실이 신선하게 서글펐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 속 인물 중 어린이집 교사의 대사에서 T가 떠오른 것은 그래서였다.

무지의 모순. 익숙한 관념에 젖어 뱉어내는 우려가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것을 보여주는 대사였다. 그래, 그 어린이집 선생님처럼 T는 관성으로 한말이겠지. 혹시 T 나중에라도

'미안해, 그땐 내가 너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렇게 말했어.'라는 사과 하지 않길 바랄 정도이다.


문구점에서 2천 원을 주고산 하루 공책의 첫 장을 펼쳐놓고 이번 주를 복기하던 J는 영화 한줄평과 T에 대한 소회를 묶어보기로 한다. 제목은 너그러움과 구김. 찌질했던 T는 어느덧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고, J는 더 잘게 겨져버렸으니, 이 어울리는 첫 문장을 애써 찾아본다. 글쓰기는 배설과 같아서 말과 달리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글은 마음껏 쓸 수 있고, 그렇게 마음속 쓰레기를 쏟을 수 있는 공책이 J는 새삼 고맙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글쓰기 여정은 T의 가벼운 그깟 한마디에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