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옷장 정리할 일만 남았습니다.
삼 형제를 키우면 옷은 물려 입을 수 있어서 좋겠다 말한다. 물론 그러한 면이 있다. 매우 좋은 점이다. 하지만, 그만큼 옷을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 큰 아이에게 작아진 옷이라도 작은아이가 입을 거라 정리하지 못하고 박스에 넣어 보관한다. 그러다 그 옷이 있다는 것을 잊는다. 옷이 너무 많이 쌓인다.
삼 형제가 어릴 때는 엄마 취향대로 사서 입힐 수 있다. 핑크 티셔츠, 너무 예쁘다. 조그만 남아들이 입어도 예쁘다. 쩅한 파란색 점퍼, 너무 예쁘다. 얼굴이 하얗든 아니든, 어린아이들이 입으면 다 예쁘다.
엄마의 취향대로 옷을 입힐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학교를 가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가르치치 않았으나 성별 역할의 고정관념을 습득하게 되면 더욱 어렵다.
중고등 아들들의 옷장은 온통 시커멓다. 롱 패딩 검은색이 3벌, 그나마 회색 숏 패딩을 입는 아이가 있어 다행이다. 바지도 온통 검은 청바지 아니면 청바지, 트레이닝 바지도 모두 검정, 용케도 각자의 옷을 구별해서 정리하는 엄마의 신공이 빛을 발한다. 그 와중에 흰색 면티를 꼭 입는다. 일 년 내내, 사계절 내내, 같은 브랜드로 사다 보니 어쩌면 서로 남의 것을 입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속옷 헷갈리지 않은 것이 어딘가. 엄마도 꾀를 낸다. 세 아들들의 속옷은 다른 브랜드에서 사준다. 브랜드 태그로 구별 가능하다.
대학을 가니 드디어 유채색 옷이 등장한다. 옷장에도 봄이 오는가. 파란색 카디건이 걸리고, 베이지색 바지와 초록색 니트도 있다. 이런 옷을 어떻게 골랐을까 싶지만, 누군가 골라주나 보다 넘겨 집고 만다. 어차피 이젠 엄마에게 옷을 사달라고 하지 않는다. 20대를 넘기니 옷을 사는 요령도 엄마보다 낫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잘도 골라 사고, 반품도 잘한다. 취향도 과감해진다. 여자 친구의 취향이 반영되는가 보다 상상만 할 뿐이다. 근데 니트류를 왜 그렇게 사는지... 이젠 세탁도 시켜야겠다.
어릴 때는 아들을 먼저 키운 친구한테서 옷을 많이 물려 입혔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이젠 줄 옷이 없다고 했다. 아이의 아빠가 물려 입는다고 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젠 우리 집도 그렇다. 아빠가 아들들 작은 옷을 입는다. 세 아들에게서 나오는 옷이라 가짓수도 많다. 젊은이의 옷이라 그런가, 아님 아들의 옷이라 그런가, 흔쾌히 입는다. 옷을 잘 고른다며...
이제 다 키웠다 생각되는 아들의 옷, 아빠보다 더 커진 아들을 보는 마음이 대견함과 흐뭇함이 가득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만큼 잘 키운 '나'를 칭찬하고 대견해하는 넉넉함과 여유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엄마인 나도 아들의 옷을 가끔은 입어야겠다. 티셔츠는 입을 수 있지 않을까? 제자리를 찾아가는 아이들을 얼른 보내고, 엄마는 옷장 정리를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