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주는 단맛!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가구는 책상이다. 정리하고 처분한다 해도 아직 4개의 책상이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도 우리 집에는 엄마의 책상이 있었다. 공부하는 일을 계속해야 했고, 책상에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도 많을 때였다. 그리고 엄마의 책상은 항상 거실에 있다. 그 당시 '거실의 서재화'가 한참 유행이어서, 거실의 TV를 과감히 치우고, 커다란 책상을 들이는 것이 대부분 엄마들의 기본 행동 원칙이었던 것 같다.
공용으로 쓰는 큰 테이블이 책상으로 들어왔을 때도 엄마의 책상은 거실 구석에 자리 잡게 했다. 그 책상은 내가 대학 다닐 때부터 쓰던 책상이다. 10년도 더 사용한 책상을 계속 쓰기 위해 결혼하면서도 가져왔다. 이젠 30년이 넘은 그 책상은 원목 가구를 주문 제작하는 공방에서 크기를 맞추어 2개를 세트로 주문했던 책상이다. 책상 위에 유리를 덮고 사용하긴 했지만,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이 크면서 책상의 크기도 커지고, 개수도 늘어났다. 아이들의 책상을 마련해 주는 부모의 마음은 "너 이젠 공부할 때야!"라는 선전포고와 아이와 암묵적 합의를 하려 함이다. 또한, 엄마인 나 스스로에게 '이젠 나도 학부모다!'라는 역할을 규정하는 매개체와도 같다. 그렇게 많아진 우리 집 책상은 8개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책상을 두 개 쓰면 편하기도 하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 기숙사 학교에 가니 점점 집에서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과감하게 책상을 정리하기로 한다. 큰 책상은 2개 정도만 두고 나머지는 치우고 싶다. 큰 책상 2개, 작은 책상 1개만 남기고 처분하기로 했다. 그 목록에는 내가 쓰던 책상도 들어있다. 이젠 흠집도 너무 많고, 몇 번의 수리와 다리 교체 등으로 중고가 돼버린 나의 책상. 버릴 줄도 알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치우려는데...
"엄마 책상 제가 쓸래요!"
대대적인 처분과 정리를 마음먹은 시점에 작은 아이가 말한다.
"너무 낡았는데? 굳이 이걸 왜?"
"집에 자주 안 오니까, 큰 책상은 필요 없고.. 사이즈도 적당하고,
버리기는 서운해서요."
엄마의 책상을 버리는 것을 서운해하는 아들에게 엄마는 후한 선심을 쓴다. "그래? 그럼 쓰던가! " 쿨하게 이야기 하지만 엄마의 책상을 물려 쓰겠다는 마음은 하루를 흐뭇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두 개의 책상이 다시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세트니까 쓰려면 둘 다 쓰는 게 좋아!"
작은 아이가 대학을 가고 그 책상 한 개는 조카에게 물려줬다.
"공부 잘하는 형들이 쓴 책상, 우리 너무 좋지~~"
역시 감사하게도 귀히 여기며 가져갔다.
이제 그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아주 큰 모니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대학생의 책상이지만, 여전히 집에서 지내지 않고, 게다가 지금은 군대에 가 있다. 굳이 좋은 책상 필요하지 않으니 30년을 넘긴 책상을 계속 쓰기로 한다. 나의 시간과 아이들의 시간이 함께 있는 그 책상을 보면 '버리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엄마인 나의 책상이다.
책상을 물려주고, 거실의 책상을 쓰던 내가 다시 장만한 내 책상이다. 친정 엄마가 쓰시던 아주 오래된 식탁을 가져와 책상으로 쓴다. 테이블보를 덮고 일출이 보이고 해가 잘 드는 동쪽 편 알파룸에 책상을 두었다. 책상이 필요해서 가져왔는지, 처분될 식탁이 서운해서 책상으로 쓰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젠 책상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엄마의 책상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고, 열심히 일하는 엄마, 공부하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비쳤는지도 이젠 알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금 공부하도록 하는 아이들이 있다.
엄마의 책상을 물려받길 원하는 아들 키우는 단맛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 낸 맛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