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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 Feb 08. 2024

알아서 한다니, 다행이다

"반드시 나의 손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애지중지 키우는 화분이 늘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잊고 방치한 것들이 가끔 이렇게 훌쩍 자란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별로 챙기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잘 크고 있다. 처음에는 잘 키워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더 잘 키워야 하는 것들이 자리를 잡고, 적당히 한편에 치워두고 있었다. 가끔 물은 준 것 같고, 마침 해가 잘 들어오는 위치에 놓여 있었던 이유로, 알아서 잘 자라고 있었다. 




수년동안 한 자리를 지키는 호접란도 알아서 꽃을 피운다. 가끔 넘치지 않을 만큼의 물만 주고 있는데도 꽃대를 올린다. 자리가 잘 맞으면 당분단 계속 꽃을 피울 거라 하니 나는 자리만 지켜주면 된다. 그 자리에서 뿌리를 키우고 새 잎을 내면서  알아서 세월을 지낸다. 얼마나 기특한지. 조용히 제 꽃을 내미는 모습에 한 해가 시작됨을 느낀다. 꽃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알아서 하겠노라고 표현하지 않지만, 이렇게 묵묵하게 제 역할을 다하는 존재를 마주하면 나의 믿음조차 불필요함을 느낀다. 알아서 한다는 것이 누구의 수고도, 누구의 기원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한 수고를 요구하지 않고, 부당한 기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알아서 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 



알아서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그래서 매우 자연스럽다. 서로에게 불필요한 노고를 바라지 않고, 배려를 강요하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하는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서로의 물줄기를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잊지 않기 위한 소소한 관심이면 충분하다. 



알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명확히 인지하는 학생들이다.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자신의 방법을 찾고 있다. 시행착오를 겪는다 해도, 그 역시 알아서 하는 과정이라 옆에서 보기에 불안하지 않다. 알아서 제 자리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청하는 것 위주의 도움이면 충분하다.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여 준비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많은 가정에 알아서 한다는 아이들이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부모의 잔소리에 '내가 알아서 할 거야'라는 대답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알아서 한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지 의심되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또래의 부모들도 아이들이 알아서 한다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늘 더 큰 소리로 대답한다. '퍽이나! 알아서 하겠다!' 그렇게 아이들이 알아서 할 기회를 앗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외침은 계속된다. '알아서 한다니까!'. 물론 부모도 여전하다. '지난번에도 알아서 한다 해놓고 잘 못했잖아!' 또다시 아이들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엄마가 시킨 대로 했으니까, 잘 못돼도 엄마 책임이야!' 아이가 책임을 배울 기회도 빼앗는 것이다. 이제 책임은 부모 몫이다 



'알아서 하는 것'의 의미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성취감은 물론, 자존감, 책임감, 효능감 등 온갖 좋다는 자기 계발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고학년이 되고, 이제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알아서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알 필요도 없으니까. 굳이 알아서 하기 위해 귀찮아질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갈 때면 부모는 요구한다.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 아이들은 당황스럽다. 지금까지 알아서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갑자기 알아서 하라니,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나? 꼭 그래야 하나?' 


 




3월 개강 전에 아이들을 독립시키기로 했다. 본인들은 단순히 자취라 생각하겠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제대로 세상에 내놓아 '알아서 살아라'라는 그때인 것이다. 나 혼자 자취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부모 없이 형제들끼리 관계를 유지하며 생활도 유지해야 한다. 떨어져 지낸 시간들이 많기에 무척이나 서먹하리라 생각한다. 중간에서 대화를 이어 줄 사람도 없고, 불통의 답답함을 해소해 줄 사람도 없다. 알아서 할 일이다.



"청소, 빨래, 설거지, 알아서 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알아서 할게요!"



자취를 할 때도, 기숙사에서도 혼자 빨래를 한다. 하지만, 내 빨래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는 동생의 빨래를, 형의 빨래를 함께 해야 한다. 조율하고 이해하고 맞추어 가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 '알아서 할 것'은 이런 것들이라는 걸, 알고나 있는지. '알아서 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다'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까? 무엇을 '하기' 전에 '알아야 함'이 선행됨을 알고 있을까?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모든 상황에서 이리 자연스럽게 대답이 나올 리 없다. 

'알아서 할게요.'

'그래, 한 번 알아서 해봐라. 그렇게 말해 주어 정말 다행이구나.'   

 


알아서 한다는 말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너무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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