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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 Apr 25. 2024

'연륜'이 뭐라고 생각해?

인플루언서보다 연륜

"내가 정말 피켓이라도 들고 이 집 앞에 서있고 싶어요. 여기 정말 별로라고!"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음식점에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눈앞에 있는 밥집이었는데 알고 보니 지역에서, 아니 전국에서 유명한 곳이었더라고요. 재료가 소진되면 일찍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안내문을 읽던 찰나에 들린 목소리. 카랑카랑한 여성분의 목소리였어요. 


"여기 별론가?" 옆에서 함께 주춤한 남편에게 작은 소리로 얘기하면서, 사태를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유명한 음식점들 중에는 물론 이름값 하는 곳도 있지만, 의외로 실망스러운 곳도 있잖아요. 사실 그런 일을 별로 겪진  않았지만, 여기가 그런가? 싶어서 망설여지더라고요. 그럼에도 딱히. 다른 대안이 없어서 음식점에 들어가기 위해 말다툼을 하는 분들을 스치던 찰나에. 


"우리 남편 유명한 인플루언서예요! 인플루언서가 뭔지 알아요? SNS 알죠?"


70대는 훌쩍 넘었을 듯한 주인장은 그저 듣고 계셨어요. 인상이 그리 험해지거나 난처해 보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소위 말하는 '인풀루언서 타령'을 듣자니, 그냥 들어가도 별 이상 없겠다는 재빠른 판단이 들더라고요. '뭐야.. 인플루언서 갑질이야?'


입구를 지나 들어간 곳은 테이블이 10개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점포였어요. 주차장도 있고, 외양은 그럴듯했는데 의외로 소박한 실내였습니다. 더러 외국인이 보이기도 하고요. 빈 테이블도 한 군데 있었어요. 그보다 안내문이 먼저 보이긴 했어요. '주문과 결제 먼저 해주세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소박한 음식을 파는 곳이었기에, 가벼운 주문을 하고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았어요. 마침 상을 치우려 오시는 아주머님께 남편이 말을 건넸습니다. "아니, 왜 혼나고 계십니까?" 농담이 섞인 궁금증이었어요. 


"글쎄, 주문하고 앉으랬더니 저리 썽을 내내..." 


그리고 이어서 상황은 종료된 듯 보였고,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절로 안도하게 하였습니다. 

"어케 잘 이야기했어요?"

"얘기할 게 뭐 있나. 내가 더 유명한데..."


 그리고 우리가 주문한 김밥 두 줄과 국수 한 그릇이 나왔어요. 



"연륜이 뭐라고 생각해?"


기대 이상으로 맛있다며 연신 국수가락을 훑고 있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별로 대단한 일 겪는 것 아니라는 듯 무심해지는 것. 

감정의 상함이 없이 맡은 소임을 다하는 것. 

이전보다 대범해지는 단단함이 연륜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 할매가 연륜이네."


남편의 짧은 대답이었지만, 적극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일박이일 경주 여행을 하게 되었어요. 언제나 스치기만 해서 아쉬웠던 곳. 제대로 여유 있게 즐겨보자 생각했지만, 여전히 멀리 있는 곳이라 오고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온전히 보고 느끼는 시간은 한정적입니다. 미리 동선을 짜고 숙소와 음식점까지 알아갔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참여행이라면서. 

발길 닿는 대로 가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예상과는 다른 경주의 모습도 신선했어요. 


 

야경이 너무 예쁜 곳으로 유명해진 월정교와 동궁, 안압지를 가보았어요. 저녁 시간에 할 일은 이곳에 가는 것뿐이더라고요. 화려한 단청색에 조명이 비추니 탄성을 자아내게 했어요. 온갖 관광객들은 여기에 모두 모이나 싶을 만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은 인종과 상관이 없는 공통의 문화였어요. 그런 사람들 구경이 더 재밌다는 것. 그날 알았답니다. 하지만, 돌아서며 아쉬운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의 나무들은 밤에도 환한 조명빛을 받아야 하니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되고요. 내가 정말 보고자 하는 것이 이렇게 '신식'인 월정교였을까. 그곳에 묻어있어야 하는 세월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연륜이 보이지 않는 월정교라니...



"경주에서 본 것 중 뭐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

여전히, 저는 묻고 남편은 대답합니다. "감은사지 석탑" 

네, 저도요. 

화려하게 조명으로 장식 한 첨성대는 그냥 멀리서 잘 봤습니다. 한낮에 진짜 첨성대를 보려 하니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별로 미련 없이 첨성대는 삭제.


이번 짧은 여행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으니 불국사와 감은사지 석탑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어둠이 시작되려는 시간, 동해 바다 앞에 서 있던 석탑의 위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도 여전히 위엄이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밝은 낮에 보는 석탑은 다를까 궁금했어요.  사람이 없는, 주위의 집들도 너무 한적해 보이는, 그런 곳에 동탑과 서탑이 여전히 잘 서있었습니다. 세월의 흔적은 여전하지만, 20년 전의 흔적인지, 그 보다 오랜 시간의 흔적인지 알 길은 없었어요. 아무런 꾸밈과 덧댐 없이 비와 바람, 눈을 맞으며 세월을 견디는 모습이 감동스러웠습니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품은 여유와 연륜이 느껴졌거든요. 자세히 보면 부서지고 무너지기도 했더라고요. 금이 가있거나 상처가 생긴, 낙서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멋진 석탑 한 쌍이었어요. 세월을 견딘다는 것이 무엇일까 느낌으로 알게 하는 장소였어요. 연륜이 배어있는 그 모습에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돌았습니다. 괜히 잡초도 뽑아주면서요. 


연륜 年輪
1.       식물 나무의 줄기나 가지 따위를 가로로 자른 면에 나타나는 둥근 테. 1년마다 하나씩 생기므로 그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다.                           몇백 년을 묵었는지 연륜을 알 수 없는 늙은 수양 한 그루가 넓은 둘레에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었다.          출처 <<박경리, 토지>> 
2.       동물 물고기의 나이를 알아볼 수 있는 줄무늬. 물고기의 비늘, 귓돌, 척추뼈에 있다. 
3.       여러 해 동안 쌓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진 숙련의 정도.        


나무, 동물 등에서 나이를 알아보게 하는 것이 연륜이라고 합니다. 나이테, 비늘 등에서 볼 수 있다고 하네요. 사람의 연륜은 어디에서 올까요? '여러 해 동안 쌓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진 숙련의 정도'라고 하니, 그 사람의 행동, 언행, 태도 등 모든 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연륜을 낡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요. 

온전히 잘 낡아지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연륜이 잘 남아있는 경주에 다녀오게 되어 다행이었어요. 

그곳에 잘 보존된 연륜 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했습니다. 


경주의 감사거리는 더 있다지요. 다음 기회에 더 이야기해볼게요 



ps. 지난주 연재를 놓쳤습니다. '오늘 쓰지 못했구나' 하는 자책을 느낄 시간이 채 30분도 남지 않았었어요. 30분이 지나면 어차피 못 쓴 글이 되었던 거죠. 그렇게 하루를 넘겼는데, '하루 늦었지만 쓰자!'라는 종용의 알림을 브런치팀에서 받았어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마음을 계속 가져가야 하더라고요. 그래도 목요일이 아니라며... 한 주 결석하고 다시 쓰고 있어요. 글 쓰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변명을.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도 함께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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