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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달아쓰기

파친코 by 이민진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by 부키
선자는 평생 다른 여자들에게 여자는 고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는 어릴 때도 고생하고 아내가 돼서도 고생하고 엄마가 돼서도 고생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 고생이라는 말에 신물이 났다. 고생 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 선자는 노아에게 더 나은 삶을 주려고 고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이 물을 마시듯 들이마시던 수치를 참아야 한다고 아들에게 가르쳤어야 했을까? 결국 노아는 자신이 출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앞으로 고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한 일일까?


몇 개월을 쌓아만 두다가 단, 며칠 만에 읽어버린 <파친코>입니다. 북클럽에서 함께 읽기로 한 책이라 이번 기회에 읽어 보았어요. 영상으로 극화되었지만 보지 않았기에 접했던 내용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원작과 다른 내용임이 짐작되고요. 제가 읽고자 했던 조선 여인의 서사가 약화되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역사와 시대 상황이 변함에 따라 고향/모국/파친코라는 세 공간이 설정됩니다. 사실 그 어디에도 일본이라는 글자가 없지만, 어느 곳에나 일본이 있지요. 고향에서의 선자는 양진과 훈의 딸이며 한수를 만나는 여인이었어요. 모국의 선자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삭의 아내로 노아와 모자수의 엄마로 모진 삶을 살아야 하는 여인입니다. 파친코에서의 선자는 다시 한수와 연결되며 다른 인물들과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여인입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우리'가 아닌 '그들'의 영역에 속하게 돼요. 조선인이지만, 조선땅에 살고 있지 않은 그들, 대한민국 여권을 갖고 있지만, 대한민국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들.


이리도 모질고 다사다난한 민족이 있을까 생각했을 것 같아요, 외국에서 자란 작가에게는 특히나.

더불어 조선 여인 선자를 설정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어디에도 없을 조선의 어머니이지요. 올곧고, 굳세고, 충성스럽고 진중한, 가족을 위한 희생과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은 일본이나 미국의 엄마들과 다르게 대비됩니다. 그만큼 조선에서 여인으로 살아내는 것은 녹록지 않은 삶을 감내해야 했어요.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어머니의 역할과 조선에서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을 거예요. 거기에 선자 개인으로 부여받은 역할까지 읽는 내내 그 여인의 어머니로서의 삶과 그녀의 어머니에서 보이는 삶이 내내 먹먹했습니다.


접어 놓은 페이지를 필사하며 저에게 주인공은 선자였음을 알았습니다. 아내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그리고 딸로서 선자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싶었습니다. 내가 소속된 국가에서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그에 적응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서사는 파친코에서 실낱같은 무모한 희망에 기대는 사람들의 그것과 통하는 면이 있어요. 무엇보다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과 그 무엇이라도 살아내냐 하는 강인함이 온갖 수치심과 역경을 감내하도록 했습니다. 파친코의 잭팟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지켜보며 파친코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한 강인함이 함께 있었다 생각합니다.


선자가 꿈에서 다시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젊음과 시작, 소망이었다. 선자는 그렇게 여자가 됐다. 이 아줌마의 삶에도 평범한 일상 너머에 반짝이는 아름다움과 영광의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호흡이 긴 소설을 읽으며 저의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가끔은 소설을 읽어야.. 하는 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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