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하찮게 보기
별것 아닌 삶을 가볍게, 그러나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인생을 하찮게 보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삶이 무엇을 가져오든 담담하게 그 순간에 충실할 수 있는 태도.
삶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을 읽었다. 박 혜윤 작가의 <도시인의 월든>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소로의 <월든>과 연관되어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작가의 전작 <숲 속의 자본주의자>에서 소개했듯이, 미국의 시골에서 가족들과 함께 8년째 살고 있다. 마치 소로처럼. 물론 많이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자니까. 그럼에도 작가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여느 일상 생활자들과 다른 면이 있다. 그 태도가 궁금하고 배우고 싶었다.
'숲 속에 들어가서 자급자족하며 살아야지'라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다. 소로 같은 철학자가 자신의 생각을 실험하고 실천하기 위해 시도해 볼 수는 있겠다. 아마 2년 정도. 하지만, 보통의 사람이 아이 둘을 데리고 그런 실험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먹고사는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를 키우고 교육시켜야 하는 의미 역시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린 주부이고, 엄마이고, 사회인이니까.
그럼에도 작가는 이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소로처럼 이지만, 소로와 많이 다른 모습으로, 작가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니, 이 책에는 그 삶이 가능하도록 하는 작가의 생각, 삶의 태도가 전부를 차지한다. 어떻게 그렇게 사는지에 대한 방법이 궁금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 태도에 대한 궁금증이 더 하다.
그리고 작가가 전해주는 삶의 태도가 있다. '인생을 하찮게 보기' 하찮게 본다는 것의 사전적 의미는 '대수롭지 않게 대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많이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이고, 원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실패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문제를 담담하게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다면 많은 갈등과 번뇌를 덜어 낼 수 있다.
하찮게 대하는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평소에도 '그게 뭐 대수라고!'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많이 하게 되었다. 어차피 안 되는 일은 안 되고, 되는 일은 될 거라는 생각이 강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될 일을 되도록 하는 노력에 집중한다. 안 될 일이라 판단하고 적당히 내려 두는 것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사실 하찮게 여기기 쉽지 않다.
작가는 하찮게 여기지만, 충실하게 대하는 것을 연습하기 위해 '집안일'을 연마의 수단으로 삼는다. 집안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다. 새롭다 못해, 신박하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그런 내공이 부족한지라 하찮은 집안일을 충실히 할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여전히 나에게는 최소한만 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나름의 충실도를 갖고서.
그리고 하찮게 대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나와 연결된 우리 가족이다. 가족을 하찮게 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와 일치시키지 않음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대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남편의 승진을 나의 일생일대의 과업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의 성적을 엄마의 노력의 결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오롯이 그들의 노력의 결과이고 그들 스스로의 동기에서 일어난 성과로 보는 것이다. 그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좋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실천에 대한 의견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게 행할 수 있을까는 다른 문제이다. 내 남편의 승진은 그가 좋아하니 좋은 것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디 가서 자랑할 곳도 없고,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지 잘 모르기도 한다. 월급이 달라지겠지만, 어차피 지금의 급여도 정확히 모른다. 그것에 신경 쓸 여력도 없다. 내 월급에 신경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의 성과는 조금 다르다.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생각은 안 할 것이다. 적어도 성과를 엄마로부터의 보상과 연결 짓도록 키우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성과에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기는 했다. 내재적 동기 한편에 엄마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없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생각해 본다. 무엇을 위해 나는 기뻐했을까? 아이의 성과는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무기를 갖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능력으로 바꿀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 이곳에서 제 몫을 해내며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 능력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엄마가, 또는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영역에서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했다. 사회가 만만치 않으니까, 하찮지 않으니까.
결국, 같은 것 아닐까? 작가가 두 아이를 키우는 태도 역시, 아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르친 것이고, 나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 차이는, 그곳은 미국이고, 여기는 대한민국이라는 것.
그럼에도 하찮게 여기면서 충실한 마음을 갖는 것. 무심하면서도 몰입하고 집중하는 것. '나'를 중심에 두고 선량한 이기주의자로 사는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태도에 '태연하고 담대함'을 추가할 시도를 해 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