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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기한 Jan 15. 2024

임신이 이렇게 눈물 날 일이었나

8. 의사 선생님도 놀란 임신

한동안 발걸음을 끊었던 난임병원을 다시 방문했다. 차이가 있다면 난임 치료가 아닌 임신 확인으로 왔다는 점이었다. 두근대는 마음을 누르며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만났는데 아직도 아기집이 보이지 않았다. 


피검사로 임신을 확인해 볼 수 있다고 해서 피를 뽑고 수치를 받았는데 지나치게 높았다. 피검사 수치가 200 이상만 돼도 안정권에 드는 임신인데 나는 무려 3,600 정도가 나왔다. 정상범위에서 과하게 높아도 자궁 외 임신 등의 가능성이 있기에 며칠을 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대박이야, 대박"이라는 의사 선생님


마침내 의사 선생님이 전해주는 임신 축하말을 듣자 눈물이 차올랐다. 난임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1년쯤이 된 시점이었다. 


"대박이야. 대박. 이렇게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준비하다가 자연 임신되는 케이스는 매우 드물어요. 100명 중에 1~2명 있을까 말까야. 어렵게 임신한 만큼 이제 이 아이를 잘 지킵시다."


임신을 준비 중인 수많은 부부를 봤을 의사 선생님 입에서 계속해서 "대박이야, 대박"이라는 말이 떠나질 않았다.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표하며 진료실을 나왔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한참을 진료실 앞에서 울었다. 어찌나 울었던지 간호사분이 물어볼 정도였다. 


"좋아서 우시는 거죠? 안에서 무슨 일 있으셨나 했어요."  


임신이 확인돼도 바로 산부인과로 옮기지 않고 10주 차까지는 난임 병원에서 진료를 본다. 이 시기가 초기 유산 확률이 높기도 하고, 임산부의 몸 상태에 따라 질정, 호르몬제 등 추가 처방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봐온 난임병원에서 임산부 수첩을 받는다. 드디어 나도 임산부 수첩을 받았다.  



"저 임신했어요"라는 말과 쏟아지는 눈물


이후, 주변에 서서히 임신 소식을 알릴 때도 눈물이 함께 했다.

임신 소식을 전하는 당사자인 내가 울먹이면서 말하는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특히, 양가 가족에겐 알릴 땐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울었다. 가족도 우리 부부 사정을 아니깐 같이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건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이 없이 지금처럼 둘이 아끼며 사는 것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남편과 나누고, 때로는 난임병원 일정보다 업무 회의에 늦지 않는 게 더 중요했고, 오랫동안 가족에게 난임병원 다니는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나인데 사실 이 모든 행동 속에 임신을 하지 못할까 두려운 내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난 내 마음을 숨기며 방어벽을 만들고 있었던 걸까? 


하도 울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속으로 '울면 안 돼'를 되뇌고 사람 눈을 마주치지 않고 허공에 띄운 채 임신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울음과 함께 전한 간단한 한 줄. "저 임신했어요"지만 무한한 축하 인사를 받았다. 

 


실낱같은 희망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어렵게 임신한 만큼 이제 이 아이를 잘 지킵시다"를 듣는 순간 나 역시도 이 아이를 수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앞날은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재임신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산부가 되면 여러 가지 사회적 배려를 받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직장인 임산부 단축근무적용이다.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12주 차까지, 36주 차 이후부터는 단축근무적용이 가능해 2시간 늦은 출근 혹은 이른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임신확인서를 받아 든 순간 바로 팀에 공유하고 회사에 제출했다. 

혹자는 안정기에 접어드는 시점까지 일부러 회사에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일찍이 말하고 배려받는 걸 택했다. 


왕복 3시간 30분~4시간에 걸쳐 경기도-서울 출퇴근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야근도 많은 부서였기에 초기 몸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대대적인 회사 조직 개편 시점과 맞물려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팀마다 갑작스레 업무가 축소되거나 홀딩되었다. 회사 변화는 컸지만 개인적으로는 초기 임신 기간을 보다 한가롭게 업무 하며 보낼 수 있었다. 

 


인생이란 건 알 수 없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체력적으로 힘들어 이 달이 빨리 끝났으면 했던 5월에 임신이 됐다. 

임신증상에 기대했다가 테스트기에 좌절하는 일희일비를 반복했을 때는 그렇게 오지 않다가 어느 정도 내려놓은 순간에 아기가 찾아오다니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차마 놓지 못한 실낱같은 희망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아직도 이때 생각하면 신기할 뿐이다. 혹자는 교통사고가 액땜이었던 거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한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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