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임신은 감사하지만 내 나이는 현실
개인의 생각과 취향이 존중받는 핵개인화 시대가 되면서 결혼과 임신 역시 선택의 영역이 됐다.
내 주변에도 결혼하면 꼭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사람보다 "아이를 낳아야 할까?"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엄두를 못 내는 사람 중엔 나도 있었다. (그러면서 내 주변엔 결혼한 부부 거의 대부분이 아이를 낳았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한 생명을 낳아 제 몫을 하게 되는 사회구성원으로 키우기까지 최소 20년을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무거웠지만, 키우면서 드는 경제적인 부담까지 생각하면 고민은 더 깊어졌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가진 게 없어도 최소 두 세명의 아이를 낳는 게 당연했지만 요즘 시대는 달라졌다.
가진 게 없으면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부모도 아이도 불행해지기 쉬운 시대가 되어버렸고 그 속에서 중심을 잡는 건 또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나 역시 아이와 함께 하는 행복감보다 앞서 떠오른 고민이 포기해야 할 것과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주변에서 말하는 내 자식이 주는 행복감과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데 아이가 없을 때는 체감이 잘 안 됐고, 당장 내가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과 경제적 손실만 보였다.
"아직 우리 집도 없는데 아이 낳으면 언제 돈을 모아 집사지?"
"육아휴직하면 수입이 줄어드는데 생활비랑 육아비용을 같이 감당할 수 있을까?"
"회사 복직하면 아이를 누가 봐? 베이비시터도 요즘은 최소 200만 원이래."
"지금 낳으면 60살까지는 일해야 하는데 중간에 누구라도 한 명 아프면 어떡해?"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내가 얻은 보상보다 잃은 손실을 더 고통스러워하는 손실회피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주식으로 얻은 이익과 손실이 동일하다면 이익의 보상감보다는 속 쓰린 감정이 더 오래간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임신을 바라게 된 건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일부분이 충족되면서였다.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꾸린 가정, 즉 남편과 함께 하는 결혼 생활이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
남편과 같이 살면서 '나만의 든든한 지지자가 생긴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고 느끼며 많이 웃는다.
남편하고 노는 게 제일 재밌다보니 자연스레 우리를 닮은 아이, 남편을 닮은 아이를 자꾸 그려보게 됐다.
내가 엄마로서 부족해도 남편이 부족한 부분을 잘 메워줄 거라는 확신이 더해졌다. 기쁨은 기쁨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어렵거나 고민인 순간은 함께 나누면서 그 시간을 잘 이겨낼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혼부부 특별공급으로 예상보다 빠른 시점에 자가를 마련하게 되면서 주거에 대한 스트레스가 일부 해소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결혼하고 얼마 안돼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전세 계약 2년이 끝났을 때, 우리가 계약한 전세가보다 정확하게 1억이 올라있었다.
천천히 자가를 마련할 생각이었는데 치솟는 집값과 더불어 내 불안 지수도 높아졌다. 우리 명의로 된 집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는 건 사치처럼 느껴졌다.
청약을 넣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정식 발표에선 떨어졌던 아파트 추가 계약 예비번호가 우리 차례까지 왔다. 은행 대출과 함께 사는 내 집이지만 자가가 생기니 마음 한편이 편해졌고 본격적으로 임신을 준비하게 됐다.
임신을 마음먹기까지 쉽지 않았고 임신이 되는 건 더 어려웠지만 결론적으로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이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워지고 나서야 아이를 꿈꾸게 됐다.
임신을 하고 나서 더한 현실을 마주하게 됐는데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내 나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평소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지냈지만 생물학적인 나이가 고령산모(만 35세 이상) 경계에 있었다.
자연임신을 하게 된 건 감사한 일이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몸이 힘들어지는 건 현실이었다.
살랑이는 바람에도 맥없이 떨어지는 벚꽃 잎처럼 매가리 없어진 체력, 많이 먹으면 먹은 대로 토하고 반대로 적게 먹거나 먹지 않으면 위액이라도 토해내던 임신 입덧은 고역이 따로 없었다.
임신 생각이 있다면 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아이를 가지라고 하는지 실제 임신을 하니 확 이해가 됐다.
임신을 하고 나서 내 생물학적인 나이와 몸 상태를 직시하며 현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체력이 전과 같지 않았기에 활동 반경을 줄이고, 외출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낮잠이나 좋아하는 과일을 먹으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그리고 요가와 남편과 같이 가벼운 산책을 꾸준히 하고 매일 저녁 태담을 통해 뱃속 아이와 교감을 쌓았다. 1,2차 기형아 검사와 정밀 초음파, 임당까지 무사히 통과하고 마지막 과정인 출산 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났지만 (다른 편에서 다룰 예정)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순탄했다.
출산 이후에는 양육의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데 <대한민국 양육비 계산기>를 통해 총 양육비용을 간접 계산해 볼 수 있다. 나는 19살 때까지 키우는 비용으로 계산했는데도 6억이라는 숫자가 나오더라... 심지어 2019년 물가인데 6억? 이건 직시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양육의 현실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받아들이고 마주해야지.
피할 수 없으면 뭐다? 즐기자.. (근데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까.. 이렇게 되는 건 아닌지..)
궁금한 사람을 위해 <2019 대한민국 양육비 계산기> 링크를 첨부한다
http://baby.donga.com/2019-10-10-born-and-raise-receipt/01_receipt/index.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