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일시적 퇴사를 앞둔 임산부의 즐거운 회사생활
한때 이직을 목표로 열심히 면접을 보던 때가 있었다. 면접을 본 회사는 게임 회사, 콘텐츠 등 분야도 다양했는데 욕심 많은 나는 난임병원도 같이 다니고 있었다.
임신과 이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임신도, 이직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일단 뭐라도 하나는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바쁘게 움직였던 때였다.
정작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몰래 면접을 보기 위해 반차를 내고, 출근 전에 난임병원에 다니는 마음 한 편에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이직했는데 임신을 알게 되면 어떡하지? 그럼 완전 민폐다'
'임신을 하면 이직 시점이 최소 2년은 늦춰질 텐데 그때 내가 이직할 수 있을까?'
면접은 내 불안한 마음이 영향을 미쳤는지, 타이밍이 아니었는지 번번이 한 끗에서 미끄러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이직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마지막 면접 보고 4개월 뒤에 축복이 찾아왔으니까.
임신을 하면 결혼 못지않게 모두의 축하를 받는다.
결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임신은 엄청난 신체적, 감정적인 변화가 동반되다 보니 임신 당사자인 나도 행동과 말 모두 조심하게 되고, 상대방도 그렇게 날 대해준다.
가족, 동료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너그러워지고 배려를 가득해주는데 임신 아니면 이렇게 느낄 기회가 또 있을까 싶다.
임신 초에는 임산부배지를 달고 다니는 게 어색하고 멋쩍어서 가방 안에 배지를 숨기거나 임산부 배려석에서 먼 곳에 서 있었다. 눈에 띄는 분홍색 임산부배지를 달고 만석인 대중교통을 타면 임산부이기에 양보해 달라는 뉘앙스같이 느껴졌다.
K-직장인으로서 출퇴근 대중교통에서 앉아서 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 숨겼지만 임신 주수가 찰수록 속이 울렁거리거나 서 있는 자체가 힘들었기에 그런 걸 따질 수가 없었다.
임신 아니면 30대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경우가 거의 없을 텐데 출근 버스에서, 2호선 지하철에서 기꺼이 양보해 주신 분들에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업무를 던지는 게 회사인데 임밍아웃과 동시에 업무량 재조정을 했다.
긴 시간을 돌아온 아이인 만큼 임신 초반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 욕심을 내다가 아이가 잘못되면 죄책감을 이겨내기 힘들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면담을 요청해 진행하고 있는 업무와 이후 방향을 말씀드렸고 상사와 같이 조율하면서 적당한 업무 범위를 설정할 수 있었다.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이직 후 3년째 재직 중인 회사다. 처음에 입사하고 구성원 대부분이 20대 중심이라 30대 중반에 입사했던 내가 늙은이처럼 느껴지는 젊은 조직이었다.
임신 케이스가 나까지 포함해도 열 손가락 이내일 정도로 아직 많진 않지만 회사 전반적으로 나이스한 분위기에 구성원 전반이 상식적인 범주의 사람들이라 임신을 밝혔을 때도 눈치는커녕 많은 축하와 배려를 받았다.
단축 근무 적용 / 야근 금지 / 휴일 근무 금지
임신 아니어도 이런 제도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임산부는 법적으로 특정 기간 동안 (12주 이내, 36주 이후) 일 6시간 근무만 하는 단축 근무를 적용받을 수 있는데 6시간 근무는 생각보다 짧고 금방 끝났다. 당연히 야근은 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해내야했던 원래의 업무양과도 이별하게 됐다.
이렇게나 좋은 단축 근무를 임신 기간 내내 지원해 주는 회사 복지와 임산부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직속상사 덕분에 최소한의 프로젝트에만 투입되어 업무를 진행했다.
일이 몰리거나 바빠질 때는 우선순위 업무 위주로 스케줄 관리가 필수였지만 기본적으로 임신 전보다 양 자체가 줄어들다 보니 일할 맛도 나면서 이 정도의 일만 하면 회사 계속 다닐만하다고 느꼈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면 답답하고 불안할텐데 나의 목적지는 정해져있었다.
회사 생활의 '마지막 출근날'이 정해져 있으니깐 회사 다니는 게 전만큼 지겹거나 갑갑하지 않았다.
휴직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일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업무 마무리와 인수인계로 업무가 더 좁혀짐과 동시에 내 마음은 회사탈출로 신이 나기 시작했다.
휴직해도 3개월의 월급과 육아휴직금으로 통장은 채워지고, 아프거나 슬픈 일이 아닌 좋은 일이었고, 출산 전까지는 한 달 남짓 내 자유 시간도 가질 수 있다. 그
리고 무엇보다도 회사 밖 자유를 누린 다음 내가 돌아올 자리까지 보장되어 있는 아주 귀한 기회였으니 마지막 출근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마지막까지 마냥 즐거울 것 같았지만 책상 정리를 시작하고, 팀에서 출산파티를 해주고, 친했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자 휴직이 아닌 퇴사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편하게 1년 3개월 정도 떠났다가 오면 되는데, 회사에서의 1년은 금방인데, 이상하게도 뭉클한 마음이 들어 살짝 눈물이 나기도 했다.
사람 앞 날은 모르니 퇴근 직전 한 사람 한 사람 동료들 자리를 찾아가 휴직 인사를 전했다.
"저 2025년에 복직하는데 그때도 계실 거죠?"라고 농담처럼 던졌지만 그 사이 회사도, 조직도, 어쩌면 나도 변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에 반 퇴사 같은 기분으로 마지막 퇴근길을 마무리했다.
입덧과 무거워져 오는 몸으로 출퇴근길이 힘들기도 했지만 임산부라서 받을 수 있던 친절함과 배려심, 관심은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고.
출산하고 나니 트렌드가 눈깜짝할 새 변하는 것처럼 나에 대한 관심도 아이에게로 재빠르게 옮겨간다.
작고 귀여운 신생아에게 모든 관심이 쏠리니 임신한 지금 세상의 친절과 관심을 맘껏 누리면서 회사에도 당당히 요구하시길. 그리고 일시적 퇴사를 앞두고 즐거운 회사생활 되시길!
감사하게도 나는 회사에서 많은 배려를 많았지만 종종 최소한의 정부 지침도 지키지 않는 사례를 맘카페에서 종종 본다. 임신한 걸 눈치 준다던가, 야근을 시킨다던가 추가적인 배려는 하지 않더라도 기본은 지켜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