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1
엄마는 2019년부터 시작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끝내고 2020년 1월에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그 뒤로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리는 잘 살고 있던 아파트를 급하게 팔고 나왔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어 장남인 아빠가 두 분을 모셔야 했기에 할아버지 댁으로 급히 합가를 한 것이다. 오빠는 그즈음 독립을 했고 나는 아빠,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 가까이 지내보니 두 분의 상태는 많이 안 좋았다. 할머니는 치매가 시작되어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겼고 그 영향은 자연스레 할아버지에게도 흘러갔다. 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쌀을 안쳤다. 냉장고엔 먹지도 않은 밥이 랩에 꽁꽁 싸여 한가득 쌓여 있었다. 신던 신발을 옷장 안에 넣으시기도 했고 몰래 엄마 옷을 가져가 본인 옷이라며 고함치시기도 했다. 마르지 않은 빨래를 그대로 옷장 안에 꾸겨 넣는 건 부지기수고 조리가 안 된 스팸을 숟가락으로 퍼 드시기도 했다. 할머니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자 할아버지는 식사도 많이 거르셨고 총명함을 잃어갔다. 그저 할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다치지 않게 돌보실 뿐이었다. 아빠는 많이 슬퍼했고 크게 무너져 내렸다. 평생을 모시고 살았던 아빠의 부모님이다. 몇 년간 떠나 있었다고 이렇게 건강이 악화되실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던 그 작은 몇 년을 후회하며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집은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오빠를 이어 나도 독립을 했다. 사실은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이곳에서 나가 걱정 없이 내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 그래서 독립 이후에 나는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일상을 공유하지 못했다. 엄마는 그 사이에 유방 복원수술을 결심했다. 비록 환경이 바뀌고 아픈 시부모님을 모시며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엄마는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강동 경희대병원에서 유방 복원술 상담을 받았지만 결국엔 아산병원에서 수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유방 복원술의 과정은 유방이 있던 자리에 확장기를 삽입해서 긴 시간에 걸쳐 크기를 키운 다음 확장기를 빼내고 최종적으로 그 자리에 보형물을 넣는 것이었다. 엄마는 확장기를 삽입했고 그 뒤로 두 세 차례 병원을 다녀오며 수술 준비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피할 수 없이 겨드랑이 통증과 어깨 통증을 달고 살았다.
그때 즈음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새벽에 구급차에 실려간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고 병원에서 기적처럼 고비를 넘기셨다. 담도가 막혀서 뇌로 피가 공급되지 못했던 것인데 처음엔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셔서 의사가 수술을 권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빠와 형제들은 연명치료에 대한 상담을 받았고 할아버지의 장례까지 고민했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할아버지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었고 담도 수술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수술 후에는 요양병원에서 지내시게 되었다. 참 다행이었으나 동시에 불행이었다. 할머니를 곁에서 보살펴 줄 사람의 부재는 엄마가 그대로 떠안았다. 할머니는 가끔씩 집 밖을 나가 다른 집 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빨리 이사를 가야 한다면서 짐을 싸고 나가기도 했다. 할머니를 혼자 두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항상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만 했다. 아빠는 사업을 그만둘 수 없었기에 그 보호자 역할을 1년 반 동안 엄마가 감당해왔다. 할머니 자식이 멀쩡히 셋이나 있는데 왜 그 수고로움을 우리 엄마가 온전히 감당해야만 했을까? 가족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고 실로 실망을 금치 못했다.
2021년 12월 31일.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날에 엄마는 유방암 전이를 진단받았다.
골반, 척추, 어깨, 림프절에 암세포가 전이되었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숨기다가 새해가 밝아서야 나에게 말했다. 나의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고 다시 주울 수 없을 만큼 멀리 굴러갔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를 위로했다. 그래야만 했다. 도무지 슬픈 내색을 할 수가 없어서,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엄마 몰래 많은 눈물을 거둬냈다. 엄마는 할머니의 치매약과 우울증 약을 챙기면서도 정작 제일 중요한 자신의 약은 챙기지 못했다. 할머니의 건강은 돌보면서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내게도 뼈저린 후회와 분노를 남겼다. 내가 조금 더 엄마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내가 조금 더 엄마를 자주 봤더라면 우리 엄마가 다시 아플 일은 없지 않았을까? 부모님의 병을 발견하고 자신을 책망하던 아빠의 모습이 나에게 그대로 겹쳐졌다. 나는 나를 텅 빈 곳 한가운데 세워두고 매몰차게 손가락질했다. 아, 인생은 어찌 이리도 억울한지. 왜 또다시 엄마에게 아픔을 주는지. 왜. 왜 또. 며칠을 축축한 어둠 속에 지내다가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