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
1차 항암 치료 후 병원을 찾았다. 엄마는 아빠랑 고모, 고모부와 함께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유방암 진단 전부터 정했던 일정이라 취소하기엔 미안하고 휴가만 기다리며 열심히 일해 온 본인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오늘 외래 진료 후 바로 내일부터 1박 2일로 떠나는 일정이었고 조심해서 잘 다녀오면 괜찮겠지 싶었다. 교수님은 저번 외래 진료 중 항암제 투여 결과에 따라 약을 바꿀 수도 있고 차수를 늘리거나 줄일 수도 있다고 사전에 말씀해 주셨었다. 그리고 오늘 항암제 투여 결과를 들었다.
치료제 반응은 괜찮은 편인데 투여 후 백혈구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져서 면역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하셨다. 항암 치료제의 기본은 세포를 죽여 암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고 죽는 세포엔 정상 세포도 물론 포함된다. 보통 백혈구 수치는 1500 정도를 웃돌지만 엄마는 치료제 투여 후 140 정도로 많이 떨어진 상태라 감기만 옮아도 치명적이라고 하셨다. 자가 격리가 완벽하게 가능하면 그냥 보내주겠는데 치료의 기본이 흔들릴 것 같으면 차라리 입원하라고 하셨다. 외적으로는 별 이상 없어 보였던 엄마이기에 수치상의 결과가 우리에겐 좀 당황스러웠다. 엄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일 강원도로 휴가 가기로 해서 입원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고 교수님은 내가 살아오면서 봐 왔던 어떤 단호함보다 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그럼 더 집에 못 보내준다고 입원조치를 취하셨다. 수치가 너무 낮은 편이라 역격리 입원이 가능해 보험처리가 가능하니 격리 병동으로 입원을 하라고 하셨다.
얼떨결에 입원 수속을 밟고 엄마랑 나는 터덜터덜 역격리 병동을 향했다. 가장 구석진 곳, 입구마다 비치된 마스크 박스, 1인실, 이상하게 생긴 침대. 휴가를 못 가게 된 엄마는 이 상황을 살피더니 멋쩍게 웃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해보냐며 드라마 속 한 장면 같다고 놀려줬다. 걱정되기보다는 웃음이 났다. 엄마는 병원복으로 바로 환복을 하고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추정하기로는 엄마 없이 셋이서만 가기로 결정된 듯싶었고 엄마는 홀로 이 병실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엄마 덕분에 나는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과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들을 마주한다. 겪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들이지만 이 경험들은 나를 더 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더 크게 만든다. 갚을게 참 많은 인생이라 벌써부터 갚을 기회를 몇 개씩 던져 주시는 것 같다. 이 기회를 잘 받아내서 평생의 후회로 남기지 않길 마음으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