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왔다.
공주 놀이하는 날!
어릴 적 디즈니 프로그램을 보며 꿈꾸던 공주가
현실판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
유치원 다닐 때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연극을 한 적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동갑내기 7살 꼬꼬마 왕자님의 입맞춤으로 깨어나는 공주 역을 맡아, 황홀한 공주 세계(?)와 찬란한 드레스의 맛을 일찌감치 한차례 경험했다.
이때부터 나의 옷장에는 한 번씩 디즈니 공주 드레스가 자리 잡았었다. 적어도 튀기 싫어하는 사춘기 시절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서였을까. 드레스 투어는 잊고 있던 나의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켜줬고,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을 같이 꺼내 주었다.
사실 나에게 있어 드레스의 중요도는 메이크업 다음 순이었다. '패완얼(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을 굳게 믿어서였는지 메이크업과 다이어트만 성공한다면 무얼 입어도 평균 이상은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난 패션 종사자로서 매우 부끄러운 발상을 한 거였다. 여배우들이 시상식을 앞두고 왜 드레스 쟁탈전을 치르는지... 드레스가 미치는 어마 무시한 영향을 간과한 짧은 생각이었다.
드레스 투어는 일생일대의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기 위한 여정 중 하나인 만큼 그 이면에는 엄청난 수고가 동반된다.
짧은 시간 안에 평균 3-4벌의 드레스만으로 나만의 샵을 찾아야 한다. 결정장애가 있는 신부에게는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특히 중요한 이유다. 또한 투어 때는 촬영이 엄밀히 금지되는 바, 추후 선택이 힘들 수 있기에 순간순간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이날 세 군데를 투어 했다. 경험에 의해 간략하게 말하자면, 첫 번째 샵은 대체로 ‘와’ 하고 입을 떡하니 벌리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아가 형성되고(?) 그런 눈부신 드레스를 입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이 주는 강렬한 효과를 톡톡히 본다.
너 스스로 네가 예쁘다 하고
자아도취에 빠지는 드레스가 있을 거야.
거기를 택해"
나보다 두 달 앞서 결혼한 친구는 드레스 투어를 앞둔 나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그리고 난 마지막 샵에서 그 친구의 말을 깨달았다. 정말 거울 속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에 반하는 순간이 있다! (공주병 초기 증상을 의심할만한)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길, 뉘엿뉘엿 해는 이미 넘어갔고 아침부터 굶은 탓에 뱃가죽과 등가죽이 만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무척이나 행복했다.
누군가에게는 획일화된 웨딩드레스 산업에 회의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부질없음을 호소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육체적 피로를 잊게 할 만큼 즐거웠던 ‘공주놀이’였다.
언제 이런 대접을 받으며 호사를 누려보겠는가!
가만히 있어도 예쁜 옷 입혀주고 헤어도 만져주고 거기에 끝없는 칭찬세례까지 쏟아지는데... 살면서 하루쯤은 이런 공주 인형으로 사는 것도 괜찮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