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없는 이해관계
어떤 계절에 만난 사람이든 지나고 보면 여름에 있었다. 달콤한 봄밤에 처음 만났어도, 꼭 붙어서 걷던 한파 속에서 처음 만났어도 사랑은 언제나 여름에 멈춰 있었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댄다면 모든 생명이 가장 왕성해지는 계절이기 때문일까. 나에게 있어 여름은 한낱 청춘을 의미해서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처음 깊이 사랑해본 사람과 만난 계절이기 때문일지도. 그와 힘들게 헤어지고도 계절은 돌고 돌았다. 열여섯 번 정도 계절이 바뀌는 걸 함께 봤던 것 같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나는 몇 번이고 관계에 돌입해 다시 실패하고 그러는 동안 마음은 너덜너덜해져버려 그를 열렬히 사랑했던 내 마음이 기억나지 않게 됐다.
인간의 정신을 파고든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연애관계에서 부모와의 관계를 복습하게 될 거라고. 어떨 때 그건 저주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원치 않게 결혼하거나 나를 닮아 우울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됐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전문가들의 저주 그대로 불행한 연애를 반복했고, 마음이란 것은 부정하고 외면할수록 그 어떤 맹렬한 여름보다 가혹하게 더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부정했던 부모님의 사랑은 내 모난 마음을 끌어안듯이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나 그리고 부모님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나서야 나는 연애관계에서의 반복된 패턴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며, 나는 사람이 어렵지만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다. 변화는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한 번의 충격으로는 고쳐지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꾸준히 쌓인 상처 탓에 마음은 모난 꼴이 되어 왔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살면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겪고 변화할 수 있다. 내 변화의 계기는 어떤 이별이었다. 당시 나는 어딘가 굳게 속해 있다고 믿었다. 내 부모님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회복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타의적으로 거기서 추방당했다. 내가 추방당한 건 옳은 일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해명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고 같이 살던 사람에게 외면 당한 동시에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부끄러워했다.
근로능력 없음으로 수급비를 받으며 일을 하지 못한 그 시기 내가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 이체받은 금액이 2,000만원이 넘었고, 자발적으로 신용대출을 받은 게 꼭 그만큼 있다. 간헐적으로 엄마는 힘에 부치다는 것을 표현할 뿐 나를 기다렸다. 조금만 더 믿고 기다려달라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손가락질 당할 때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던 내 인생이 너무 단단한 기둥 몇 개로 이어져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서였다. 자살충동이 물밀듯이 밀려오던 나날 중 엄마의 대답에 따라 내 생사를 결정짓겠다는 아둔한 발상으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내가 살아 있어서 좋아?" 내 물음에 아무것도 따져묻지 않고 당연하다고 말해주는 엄마는 또 다시 나를 살렸다. 내가 살아 있음을 기뻐하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까 싶은 찰나였다.
뒤늦게 알았다. 내가 추방당한 세계는 나의 옳은 면을 지지했을 뿐,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걸. 나를 진짜로 사랑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은 내가 가장 약해져 있을 때 나를 떠나지 않는다. 불가피한 상황에 혼자두게 되더라도 돌아오는 것이다. 늦은 밤 언니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너의 삶을 비난할 수 없어, 네가 사람을 죽였다 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나는 그래도 너를 보고 살 거야. 나는 한참 울고 나서 어떤 여름을 떠올렸다. 온가족이 주방에 모여 앉아 런닝구에 빤쓰만 입고 차가운 국수를 해먹던 그해 여름. 단번에 얻지 않았기에 나는 그토록 이 사랑이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