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양사기 당한 강아지와 3년째 동거 중
2021년 여름, 처음 내 강아지를 만난 곳은 서울 마포구였다. 개 공장의 폭력적인 현실과 펫샵의 공모관계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개를 키우지는 않았지만 사지 말고 입양해야 한다는 주장은 익숙했다. 당시 나는 중년에 접어든 노령묘 한마리와 함께 사는 중이었고, 부끄럽게도 네이버에 '서울 유기견 입양'을 검색하는 순간까지도 무지했다. 급작스레 강아지를 키워야겠다고 결심한 건 경제적, 정신적으로 안정되어서가 아니라 <별탈 없으면 어떻게든 키울 수 있겠지>란 막연한 충동에서였다. 안정되어서가 아니라 안정을 찾고 싶어서. 짧은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느 때보다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는데, 동거인의 '개 키우고 싶다'는 한 마디를 실현시켜주고 싶다는 이기심으로 함께 택시를 불러 마포구로 향했다.
처음 찾은 곳은 프리미엄 광고로 유기견을 입양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입구에서부터 강남의 모 성형외과 못지않게 밝은 조명과 화려한 인테리어가 빛을 뿜고 있었다. 거기에는 각각의 울타리에 갇힌 어린 개들이 잘 치장되어 있었다. 관리에 소홀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누가 봐도 펫샵임이 분명했다. 울타리에 붙어 있는 가격표들, 백, 이백이 훌쩍 넘는 분양가가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었다. 동거인과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나와 다음에 찾은 센터로 향했다. 거긴 그렇게 노골적으로 펫샵의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지만(규모가 작았다) 검은 털을 헝클어뜨린 푸들 노견 한마리만이 구석자리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그곳은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더 많이, 그렇지만 똑같이 젖을 막 뗀 것같이 어린 고양이들이 제각각 갇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켠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세차게 꼬리를 흔드는 네가 있었다.
나이나 견종, 그 어떤 것도 정하지 않은 채 유기견을 데려오자는 허술한 계획으로 방문한 거였기에 털은 듬성듬성 나 있지만 아직 체구가 작고 성격 좋아 보이는 네가 눈에 띄었다. 불안함에 끊임없이 짖어대는 노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강아지는 너와 노견 둘뿐이라서 고양이 샵에서도 유기견을 입양시키는가보다, 넘겨버리고 싶을 만큼 네가 좋았나. 나는 단번에 네게 반했고 홀린 듯 계산을 치렀다. 지금도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면 내가 정말 입양이 아니라 구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는지 의뭉스럽다. 그 의뭉스러움을 수없이 곱씹으며 자괴감에 빠졌다.
나는 그렇게 너와 동거인, 셋이서 집에 돌아와 한껏 귀여워하고 나서야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인터넷을 뒤진 탓이었다. 너는 그해 3월생(이랬다)으로 5개월차에 접어든 나이(아마도)였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작았다. 극세사 한조각 같은 너의 털을 만지면 마른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병원에 데려가 검진을 마친 뒤에는 그렇다고 무를 순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너는 조금 작고 마른 것 외에는 무탈했다. 그걸 감사해하는 것조차 자기혐오감이 들었다.
너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세 차례 해가 바뀌었다. 처음 계획과 달리 내 우울과 무기력에 따라서, 또는 일정에 따라서 짧은 산책조차 하지 못하고 침대에 같이 드러누워 있는 날도 있었다. 너는 가볍게 점프해 내 배위에 드러눕는다. 내 턱을 핥아준다. 나는 확실히 모자란 집사였다. 걱정과 달리 분리불안은 네가 아니라 내게 있어서, 최대 1박 2일 여행을 가더라도 주변인에게 부탁하거나 펫시터를 부르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것도 마음이 편치 않아 해에 한 번으로도 과하다 느끼고 있다. 당장 밥 사 먹을 돈이 없어도 네가 위험한 상황에서 주저없이 병원으로 달려갔고, 집 없이 세계 각곳을 떠돌며 살고 싶었던 나는 너 없는 해외여행은 모조리 포기했다. 그건 응당 그래야 하는 것들이고 너를 만나기 전에 굳혔어야 할 마음이었다. 그걸 늦게나마 수습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모자란 집사다.
너를 생각하면 나는 내가 부끄럽고 한편으론 또 좋다. 모자란 그대로 늘 믿고 따라주는 너라서. 버젓한 펫샵 간판을 보고도 유기견을 입양하는 거라고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할 수 있어서. 나는 너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동거인의 마음을 붙잡아보려 네게 의존했던 지난 나를 인지할 수 있었으니까. 어느덧 동거인은 떠났다. 매몰차게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셋이 남아 사계절을 맞는다. 이 집의 귀여운 생명체는 우리 셋으로 족하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