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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Jul 20. 2024

그때 내 세계는 지하에 있었다

혼란형 애착인간이 자란 곳

내가 여덟살이 됐을 때부터 부모님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전세기간을 채우면 떠나야 하는 집은 돌아갈 곳의 느낌이 아니었다. 집은 언제고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인천에 있던 아파트를 떠나 의정부 지하상가에서 부모님이 장사를 시작한 때부터 나는 외톨이가 됐다. 여섯살 터울의 언니는 학업이나 연애 문제로 늘 바빴다. 언니가 맞벌이를 시작한 부모님의 빈자리를 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톨이였다.


어떤 집은 1층의 주인집을 지나 뒤로 난 계단을 오르기 위해 나보다 크게 자란 식물들 사이를 가로질러야 했고, 계단 앞에는 시멘트로 막아놓은 우물과 청동색의 펌프가 있는 연식이 오래된 2층 주택이었다. 문을 열기 전에 나는 높은 난간을 내려다보고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난간에는 눈을 매섭게 번뜩이는 고양이가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그 집을 이루고 있는 풍경에 좋은 부분이라곤 찾을 수가 없어서 들어가면, 집은 또 낡은 카페트 냄새를 풍기며 30평대 아파트를 메우고 있던 짐을 어설프게 풀어놓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집엔 대부분 나만 있었다. 거실에 난 테라스에서 다같이 돗자리를 펴놓고 고기를 구워먹은 기억도 있지만 나는 음식에 별 관심 없는 작고 마른 여자아이였다.


부모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면 20분 가량 걸어서 지하상가로 내려가야 했는데, 거기서 나는 항상 심심했다. 나 같은 처지의 얼굴이 익숙한 아이들도 있었다. 몇 번쯤 지하상가 서부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배기에서 킥보드를 빌려 타기도 했으나 나는 금방 질려서 역전의 신원문고에 틀어박혔다. 책은 언제나 나를 주시하며 많은 말을 쏟아내는 친구였다. 식사 때가 되면 부모님의 가게에 훤히 드러난 자리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내가 그곳에 전세집만큼 정붙이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유년이 지하상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가족들은 집에 혼자 남은 나를 위해 학교 앞의 병아리를 흔쾌히 사주었다. 그뿐 아니라, 언니 친구가 사는 시골에서 데려온 강아지를 비롯해 햄스터, 거북이, 심지어 과학실험 키트 속에 개미를 키워보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곧 죽었다. 몇 번이고 거듭된 죽음을 목격하면서 나는 다마고치가 죽어도 장사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엉엉 울어제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 먹여 살리는 것밖에 몰랐기에 나는 늘 사랑이 고팠다. 내가 겪은 사랑은 끊임없는 기다림만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것이었다. 어린 나는 혼자 남겨지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을 넘어 불안하고 초조하며 무기력해져갔다. 그럼에도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부모님의 항변을 들을 때는 사랑이란 오래 참고 기다려도 일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만 깊게 남았다. 나는 무럭무럭 혼란형 애착인간이 되어갔다. 집에 데려온 친구들이 저녁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 문을 가로막고 못가게 해서 울리는 일도 있었다. 반대로 우리집으로 오는 도중 심사가 뒤틀려 먼 곳에서 놀러온 친구를 길바닥에 버려두고 온 적도 있다.


어쩌다 성인이 된 나는 당연히도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연애관계에 있어 스스로도 낯선 모습을 빈번하게 보이며 집착하거나 차갑게 돌아서거나 둘 중 하나의 양상을 보였다. 오랫동안 나와 맞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탓이라 여겼다. 애착을 가지기 시작할 때 가장 비일관적인 모습이 되는 건 바로 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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