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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l 08. 2024

엄마의 자기소개서를 첨삭하다가

엄마가 나보다 글을 잘 쓴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1).

 

대뜸 엄마에게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당장 엄마는 내 옆에 있는데 말이다. 이미 오후 열두 시쯤 나도 모르게 해외로 간 내가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는 메시지를 받았었기에 가짜 나를 이어받아, 가짜 엄마가 진짜 내 돈을 가져가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필 타이밍을 골라도 가장 나쁜 타이밍으로 골라잡았구나. 헛웃음 터뜨리며 바로 옆에 있는 엄마를 불렀다. 그들에게는 가장 나쁜 타이밍이었을 순간을 농담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다.

 

“엄마, 지금 나한테 문자 보낸 거 없지?”

“보냈는데?”

“…어?”

“엄마 이력서 제출해야 한대. 도와줘.”

 

지금 당장 써 먹혀야 할 건 다름 아닌 나였다.

 





(2).

 

살면서 내 이름으로 된 자기소개서는 써 본 적 없었다. 아르바이트 이력서에는 자기소개서가 필요 없었고, 이후 취업할 때는 자기소개서 대신 심층 면접과 맞닥뜨렸으며, 지금 다니는 회사 역시 심층 면접과 포트폴리오만 요구했다. 그러나 남의 자기소개서는 얼떨결에 세 번이나 썼다. 썼다고 해야 하나. 대필까진 아니었고, 첨삭 정도로 여겨야 하는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자기소개서는 동생의 대학 원서 중 하나였다. 리더십 전형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했던 동생은 자기소개서에서 막혔다며 나를 불렀다. 주변에 글이 취미인 사람은 나밖에 없다면서. 문제는 당시 나에게 글쓰기는 취미 그 자체였다는 건데.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은 나뿐이라며 동생은 무작정 내게 본인 자기소개서를 넘겼다.

 

써 달라는 건 아니었다. 읽어보고 본인 인생 중 어떤 구간을 쓰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는 부탁이었다. 뭐, 그 정도쯤이야. 동생 인생 대부분을 함께한 사람으로서 가만히 자기소개서를 둘러봤다.

 

성장 과정.

인생의 터닝 포인트.

우리 대학이 당신을 뽑아야 하는 이유.

 

참 나. 총 세 가지로 구성된 자기소개서는 당시 스물하나였던 내가 봐도 열아홉을 소개할 항목이 아니었다. 열아홉 살에 벌써 인생 터닝 포인트가 있으면 안 되지 않나. 앞으로 더 많은 갈림길에 설 나이일 텐데. 게다가 열아홉 살에 벌써 선택받아야 할 이유를 알고 살면 이 대학이 아니라 어디든 취업해야 할 인재 그 자체 아닌가. 덧붙여, 열아홉 시점에서 바라보는 성장 과정이 도대체 이 대학과 무슨 상관이지?

 

그러나 동생은 본인 인생을 탈탈 털어서라도 그 대학교에 도달하고 싶어 했다. 그런 동생에게 사사건건 트집 잡는 언니로 남고 싶지 않은 마음에 동생 대신 동생 인생 일부를 큰 줄기로 만들어서 내밀었다. 시간 날 때마다 이 줄기들을 엮어 보라고. 그러면 네 미완성 인생 중 일부는 담기지 않겠느냐면서.

 

그 결과 동생의 자기소개서는 동생 모교에 널리 퍼져 나갔다. ‘자기소개서는 이렇게 써야 한다!’ 그 문구와 함께 향후 사 년간은 자기소개서 샘플로 떠돌았는데, 그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퍼진 것인지 끝끝내 집안 곳곳에도 퍼진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약 3년 뒤. 낯가리는 사촌 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시각 디자인과에 진학하고 싶다는 말을 뭉개며 조심스레 내미는 것은, 또 자기소개서였다.

 

“누나, 내 자기소개서 보고 담임 선생님이 최악이래. … 왜 최악인 걸까?”

 

그걸 한평생 자기소개서 한 줄 써 본 적 없는 나를 붙잡고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지.

 

게다가 최악이라는 평을 먼저 들은 탓에 도무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최악이라던 자기소개서를 끝까지 읽어서라도 사촌 동생과 친해지고 싶었다. 나보다 더 낯가리는 그 녀석은 도통 거리 좁힐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우리 이모와 똑같이 생긴 탓에 틈만 나면 친해지고 싶은 내 마음이 문제였다. 최악인 자기소개서를 친해질 빌미로 만들겠다는 각오만 챙겨, 슬그머니 사촌 동생의 자기소개서를 펼쳤다.

 

아. 최악이었다.

 

나는 기본적인 맞춤법조차 모르는 글을 보면 울고 싶어진다. 사촌 동생의 자기소개서를 보자마자 펑펑 울고 싶었다. 게다가 맞춤법만 모르는 게 아니었다. 질문의 의도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이 고등학교에 왜 지원했느냐는 물음에 달랑 네 글자 적혀 있었다. 가까어서. 가까워서도 아니다. 가까어서였다. 물론! 가장 매력적인 이유이긴 하다! 학교가 집과 가깝다니! 매일 학교에 가야 하는 학생에게 이보다 더 매력으로 느껴질 만한 이유가 또 있겠는가. 그러나 읽는 사람은 지원자의 집이 어디인지 모를 뿐 아니라 집과 학교가 가깝다는 이유로 이 지원자를 뽑아 주기엔……. ‘가까운 디자인과’가 아니라 ‘시각 디자인과’이지 않은가. 더 나아가 ‘이 고등학교와 본인이 적합한 이유는?’ 문항에는 무려 담임 선생님이 추천해 줬다는 내용이 달랑 한 줄로 쓰여 있었다. 그마저도 맞춤법 다 틀린 채로.

 

이대로는 안 됐다!


우리 이모와 똑같이 생겨서 어렸을 때부터 귀여워한 사촌 동생이 이런 자기소개서로 소개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이 자기소개서보다는 자랑스러운! 내 사촌 동생이다!

 

서둘러 연필을 집어 들었다. 동생이 한 줄씩 쓴 답안 위로 빗금 그은 다음 큰 줄기만 대강 적어 주었다. 그 결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내밀 만한 줄기들로 자기소개서가 바뀌어 있었다. 이후 빗금과 새로운 줄기로 뒤섞인 자기소개서를 사촌 동생과 함께 다시 학교로 보냈다.

 

다행히 몇 달 뒤 합격 소식이 들렸다. (이후 전해 듣기로는 새로 부임했고, 교실 모두의 고등학교 진학에 유독 관심 많다던 담임 선생님께서 내가 만든 큰 줄기를 죄 엮어, 열심히도 자기소개서를 재구성하셨다고 한다.)

 

그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났다.

나에게 세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엄마였다.

 

 




(3).

 

이번 자기소개서도 질문은 같았다.

 

성장 과정.

이 교육 과정을 들으려 하는 이유.

본인의 장단점과 이 교육 과정의 연관성.

 

아. 대체 이놈의 성장 과정은 언제쯤 자기소개서에서 빠져나갈까. 우리 엄마 나이가 육십인데도 성장 과정은 여전히 엄마를 파악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성장 과정과 지금 이 과정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사람은 변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의 한 면만 보고 사람 자체를 판단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놈의 성장 과정은 왜 모든 자기소개서에 떡하니 자리 잡은 거야! 마음 같아서는 72pt로 ‘이걸 다 깨우친 사람이 왜 교육 과정을 밟죠?’라고 쓰고 싶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엄마 표정은 간절했다. 인생을 최대한 예쁘게 엮어서라도 저 교육 센터에 합격하고 싶은 듯했다.

 

엄마가 원한다면 뭔들 못해 줄까.

 

게다가 카카오톡 기능 중 하나인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빼곡하게 적은 자기소개서를 보여 주기까지 하는데,

 

슬슬 흥미로웠다.

이건 나도 몰랐던 엄마의 기록이었다.


나는 단순히 엄마가 요즘 뭘 배우고 싶어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중 요즘 친해진 언니에게 노인 케어 전문 관리사를 영업당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마가 엄마에게 보낸 메시지 안에는 단순 그 이상의 마음이 맞춤법 다 틀린 채로 적혀 있었다.

 

긍정적인 나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 어머니가 중증 치매로 돌아가신 그즈음 사무치게 후회하며 어머니를 위해 무엇이든 배우고 싶었다. 그러다 요양 보호사 관련 교육 센터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 공부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우리 엄마한테 얼마나 나쁜 딸이었는지를 공부하면서 알았다. 엄마처럼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을 도와주고 싶어졌다. 돌아서면 뭘 까먹는 나이지만, 돌아서고도 배우고 싶다.

 

이 얼마나 다정하고 소중한 마음인가.


엄마에겐 이런 마음이 있었는데, 난 그저 엄마를 자주 심심해하는 사람이자 팔랑귀라 남들이 뭘 하자면 같이 하고 마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야말로 우리 엄마한테 얼마나 나쁜 딸이었는지를 엄마의 서툰 자기소개서를 보며 알았다.


그러나 엄마의 자기소개서를 이대로 노인 전문 관리 교육 센터에 보냈다가는 맞춤법을 틀렸다는 이유로 쫓겨날 게 분명했다. 자자. 맞춤법만 고쳐 주자. 아니다. 웃음 대신 쓴 특수문자와 장미꽃 대신 만든 특수문자도 지워 주자! 아니다.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고쳐 주자.

 

그러기를 삼십 분.

 

무려 오천 자나 더 써 버렸다. 엄마 인생을 소개하는 자기소개서에 딸의 예측과 감상평까지 덧대고야 말았다. 그 탓에 괴상한 자기소개서가 완성되고 만 것이다. 인생 처음으로 남의 자기소개서 첨삭에 실패했다.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자 무턱대고 엄마 대신 제출해 준 다음 헬스장으로 뛰어갔다. 잘 썼다고, 저 정도면 완벽하게 고쳐 준 거라고 꾸역꾸역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4).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엄마의 자기소개서를 켰다. 인정한다. 엄마 자기소개서엔 엄마 마음만 담아야 했다. 오로지 엄마를 소개해야 하는 문서니까. 비록 A4 2장 안으로 소개하기엔 우리 엄마 인생은 소설 삼체보다 훨씬 두꺼운 분량으로 완성될 인생이지만. 그래도 엄마가 저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엄마는 A4 2장 정도일 테다. 게다가 엄마가 저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것은 ‘헤엄의 엄마’가 아니라 ‘한 사람인 자신’이므로 옆에서 지켜본 딸의 감상평과 예측은 다 떼어내야 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엄마가 쓴 글로 돌아가자.

 

그 생각에 엄마에게 다시 메시지 건네받고, 한 글자씩 맞춤법만 수정했다. 아까보다 훨씬 나은 글이 완성됐다. 역시 나보다는 엄마가 글을 더 잘 쓰는 것 같다. 어쩜 이렇게 간결하지만, 묵직하게 본인을 소개할 수 있을까. 나도 육십쯤에는 저렇게 묵직하지만, 쉽게 자신을 소개할 수 있으려나. 지금 내 인생을 자기소개서 안에 욱여넣으려면 A4 10장은 기본으로 나올 텐데.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완벽한 사람이다. 내 눈에는 너무나도 완벽하고, 엄마답기까지 한 자기소개서를 다시 교육 센터 담당자에게 보냈다. 이젠 우리 엄마의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자기소개서가 되었으니, 교육 센터 담당자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의 반짝거리는 초심을.

이 사람이 얼마나 세상을 애틋하게 보려 애쓰는지를.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될까. 다음 달에야 발표가 난다던데, 부디 담당자가 이 사람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 알아보지 못하면 사심 가득 담아서 역량 부족이라고 생각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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