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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l 19. 2024

오랜만에 산책하면서

올해 짝사랑을 기록하다


(1).


저녁마다 헬스장에 간다. 이후 애플 워치와 눈싸움을 한다. 십 초에 한 번씩 노려보는 시선으로 삼백 칼로리까지 얼마나 남았느냐는 투정을 대신한다. 정작 삼백 칼로리를 소모한 순간부터 십 분은 더 운동한다. 그래야만 삼백 칼로리 때문에 운동한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운동한 사람처럼 보일 거라는, 이상한 자기변명 때문이다.






(2).


오늘 저녁에는 헬스장을 가지 말아야겠다. 무더위 뚫고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치민 결심이었다. 문제는 도서관 문 여는 팔에 애플 워치를 차 두었다. 마음이 꿈틀댔다. 종일 앉아서 일만 하느라 삼십팔 칼로리밖에 못 썼는데. 헬스장까지 안 가겠다고. 마음이 몸을 혼내는 것 같아서 도서관 엘리베이터를 뒤로 한 채 계단으로 향했지만.


오후 여섯 시 오십삼 분.

오늘 소모한 칼로리는 작위적이게도 오십삼 칼로리.


안 되겠다. 양심상 이백 칼로리는 채우고 와야겠다. 이럴 거면 헬스장에 갈 것이지. 애플 워치에서 실외 걷기를 찾아내고 집 밖으로 나왔다.


헬스장 에어컨이 쉬지 않듯 곧 일곱 시인데도 지구는 쉬지 않고 덥다. 흐르는 땀을 닦을 손으로 앞 문장을 쓰느라 그저 땀 속에서 걷고 있다. 이런 내가 약 백오십 칼로리를 더 쓸 때까지 걸을 수 있을까. 앞 문장으로 날 의심하면서도 그저 걷고 있다.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켜야 파워 워킹으로 바뀔 듯해서 배터리 27%밖에 안 남은 휴대전화로 음악도 켰다. 앞 문장 쓰는 중에 1% 더 줄었지만, 그저 빠르게 걷고 있다.






(3).


이 게으른 기록과 어울리지 않지만, 실은 걷기로 8kg 정도 감량했다. 올해로 넘어오는 겨울과 봄 사이였는데, 그땐 걷는 시간을 하루 중 제일 좋아했다. 그때는 짝사랑인지 뭔지 모를 걸 하느라 하루에 이만 보는 걸어야 했다. 이만 보쯤 걸어야지만 일할 때 그 사람 생각이 안 났다. 안 그래도 생각 많은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온종일 그 사람 생각만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기에는 안달 난 마음을 달랠 수 없어, 눈앞이라도 시시각각 바꾸며 그 사람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곧장 달려가고 말았다.


난 집순이다. 집순이인 나에게 짝사랑은 처치 곤란 그 자체다. 집에서 가만히 생각 좀 하다가, 보고 싶어 하다가, 잠들고 싶었지만. 짝사랑이 자꾸 나를 꼬셨다. 일어나 봐. 그 사람 보러 가자. 생각만 한다고 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 짝사랑이 이끄는 대로 그 사람을 보러 가다 보면 하루쯤이야 순식간에 끝났고, 플래너에 빼곡히 적어 둔 하루 계획은 낙서로 전락했다. 제발 내일은 계획이 낙서가 되지 않도록 잠자코 생각만 하는 거야.


그러나 앞서 말하지 않았나.

8kg이 빠졌다.


보러 가지 않으려고 이만 보씩 맴돌고,

이만 보를 못 채우면 그 사람 앞이었다.


십 년 만에 저체중이 됐고, 살과 함께 짝사랑도 빠져나갔다. 계획대로 안 풀리면 스트레스받는 내가 내 손가락으로 직접 애플 워치에 삼백 칼로리를 입력하게 한. 계획대로 안 되면 잠 안 오는 나를 계획 없이 이만 보씩 맴돌게 하고 지쳐 뻗게 한. 최대한 오래 좋아할 계획을 세우자마자 8kg과 함께 빠져나간. 이 도움 안 되는 짝사랑을 기록해 둬야겠다. 만에 하나 내 마음으로 되돌아오려 하면 이 글을 들이밀어야 하니까.


이쯤에서 소모한 칼로리를 밝히자면 팔십삼 칼로리. 아니, 겨우 삼십 칼로리밖에 소모했다고? 내 짝사랑과 8kg을 기록했는데?






(4).


어쩔 수 없지.

그 사람을 어쩌다가 좋아했더라.


나와 달라서 좋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루에 이만 보씩 걷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봐도 비슷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게 좋았다. 같이 있다 보면 나에겐 최초인 것이 그 사람에게는 흔해 빠졌다는 걸 자주 깨닫곤 했는데, 그게 좋아서 매번 주변을 맴돌았다.


그 사람은 웃는 게 쉬워 보였다. 남이 자기를 쳐다보든 말든 기분 좋아지면 막춤을 막 췄다. 그와 반대로 기분 나쁘면 곧바로 미간 사이를 구겼다. 욕도 잘했고. 하여간 좋고 나쁜 걸 확실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호불호 앞에 망설이지를 않았다.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좋아했다. 누가 자기를 싫어하면 싫어했다. 단 한 번뿐인 삶을 대충 쓰는 사람도 싫어했다. 하루씩 아껴 쓰는 사람이었고, 그 하루가 모여서 박수로 완성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웃는 내 얼굴을 싫어했다. 이는 오랜 외모 콤플렉스의 상흔이다. 남이 나를 쳐다보면 기분 상관없이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욕은 친한 사람 앞에서만. 친하지 않으면 친절을 장벽 삼아, 절대 그 이상은 못 넘어오게 했다. 좋은 건 안 좋아했고, 나쁜 걸 좋아했다. 이를테면 담배가 몸에 나쁜 건 알지만, 좋아하듯이. 누가 날 좋아하면 싫어졌다. 누가 나를 싫어하면 그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서 자주 뒤척였다. 단 한 번뿐인 삶인 걸 알고, 허투루 쓸 시간 따윈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향한 박수 소리가 익숙하진 않았다.


좋아하면 닮는다.

그 말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난 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사람의 모든 게 최초라서 탐났다. 탐나는 만큼 간절히 좋아했고, 일할 때 빼면 그 사람만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우리 닮지 않을까. 아니지. 내가. 나만 당신을 닮을 수 있지 않을까.


닮은 데 없지만, 닳을 대로 닳아버린 짝사랑이 살과 함께 빠져나간 지금. 어디 보자. 백이십 칼로리를 소모했으니 이 짝사랑의 결말을 슬슬 공개해도 되겠다. 게다가 배터리도 20%밖에 안 남았다.





(5).


오늘 일하는 동안 자꾸 웃음이 나길래 웃었다. 웃음의 출처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웃기길래 웃었다. 웃을 때마다 망가지듯 일그러지는 광대뼈 생각은 이제야 한다. 하도 웃었더니 기분이 좋아지길래 어깨도 좀 들썩였다. 그 사람보다는 내 막춤이 더 나은 것도 같다. 이후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미간 사이를 막 구겨서 카페 사장님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그 사람과 전혀 다른 나답게 낯선 사람의 질문에 놀랐지만, 서둘러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사장님도 웃으며 대화를 이어 줬다.


“평일에 자주 오셔서 궁금했어요.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가 하고.”


이런 호기심이 좋아졌다.


좋아하면 닮는 만큼은 좋아했나 보다. 하긴. 이만 보나 걸어야지만 진정하는 마음이 가벼웠을 리 없다. 가볍지 않았기에, 무거웠던 살과 함께 빠져나갔음에도 그 사람은 내 삶에 떡하니 있다.


오랜만에 그 사람 생각에 푹 잠겨서 걷다 보니 막 뭐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이 기분을 막춤이라고 하자. 막춤이다. 내 방식대로 막춤을 추는 거다. 최대한 정적으로 막춤을 추다 보니 오랜만에 그 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그 사람을 보러 달려가고 싶다.


근데 배터리가 17% 남았다.





(6).


이젠 보러 가지 않아도 보고 온 것 같다. 덕분에 이백 칼로리라도 소모하고자 출발한 산책이 당신을 보고 온 날 같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무리 더워도 웃음이 안 멈춘다. 짝사랑을 끝낸 나는 당신 없이도 이만큼이나 설렐 수 있다. 이만큼이나 자랐다.


당신을 보러 갈 때마다 난 한 뼘씩 자라는 것 같았다. 당신 키가 무척 커서 그랬나. 당신과 눈만 마주쳐도 1cm씩 자라는 것 같았다. 마음이든. 나 자체든. 어디든 자라나서 지금의 내가 됐다.


게다가 당신을 만나고 오는 길이면 내가 한없이 평범해지는 듯했다. 당신 덕분에 알았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보고 돌아오는 길마다 당신은 더 특별해지고, 나는 점점 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보러 가는 날이었나. 나도 한낱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확 깨달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감당 안 될 때마다 죄 없는 당신을 탓하듯 오래오래 쳐다본 나는 평범하다. 보고 싶어서 무작정 밖에 나왔지만, 만날 수 없을 때마다 이만 보씩 걸었던 나도 평범하다. 좋아하는 걸 말해 주면 갑자기 그것들도 당신만큼 좋아졌던 나 역시 평범하다. 나에게 당신이 특별해질수록 나는 평범한 나를 찾아냈다. 꼭 보통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당신을 만나자마자 한없이 평범해졌다. 덕분이다.


또 하나의 덕분. 이 글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당신과 만나고 오는 길 같다. 며칠 전부터 평범을 포기하기 시작했는데, 금세 평범해지고 만다. 짝사랑을 끝낸 나는 이만큼이나 자랐다.





(7).


배터리는 15% 남았고, 당신 키만큼은 소모하고 싶어서 집 앞 골목을 배회한다. 이로써 이백 칼로리에서 몇 칼로리나 깎아 먹는 건지. 이마저 짝사랑의 일환 같다. 계획 없이 좋아했고, 도통 계획대로 되질 않았으며, 내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끝난 짝사랑을 기록하는 순간 역시 계획에서 조금 벗어나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상한 자기변명을 위해서라도.


마침내 백구십을 웃도는 칼로리. 당신을 닮은 칼로리를 보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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