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할수록 느는 근육이 있다

수영과 글쓰기의 상관관계

by 헤엄


예를 들면 수영이 그렇죠. 수영을 하면 첼로나 바이올린을 켤 때 쓰는 근육이 발달해요.

- 《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 198쪽

시도 때도 없이 도전해 봐도 번번이 물러서고 마는 책이었다. 총 254쪽밖에 되질 않는 책이건만, 한평생 클래식 음악이라고 해 봐야 종종 찾아간 연주회가 전부였던 나는 하루에 3 페이지만 읽어도 많이 읽었다며 책을 치우곤 했다. 그러다 어제였나. 그 책과 단둘이 떠들 만한 이야깃거리를 발견했다. 수영을 하면 첼로나 바이올린을 켤 때 쓰는 근육이 발달한다니!


책을 읽다가 대뜸 왼팔과 오른팔을 한두 번씩 앞으로 뻗어 보았다. 한 팔씩 힘을 주기도 했다. 내 눈엔 달라진 게 전혀 없지만, 첼로나 바이올린에 이로운 근육이 붙었을까. 사십 대쯤 되면 바이올린을 배워 볼까. 그땐 수영을 지금보다는 잘할 것 같은데. 그러면 수영 안 배운 사십 대보다는 바이올린을 잘 켜지 않겠어?

심지어 저 구절을 읽은 이후로 자유형이나 배영을 할 때마다 팔동작만 신경 썼다. 그러느라 너무 느려졌다는 핀잔이 이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귀 얇은 나는 죽을 때까지 배울 일 없는 첼로와 바이올린을 고려하듯 한 팔씩 돌릴 때마다 ‘지금도 내 팔은 첼로나 바이올린에 특화되어 자라고 있겠지?’ 따위를 생각했다.

그러다 수영장 바닥 타일에 두 눈이 박히기 직전이었다. 아무래도 수영은 첼로나 바이올린을 켤 때 쓰는 근육 외에도 다른 근육 역시 키워 주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 된다. 그런 생각은 몇 년 뒤에나 해 볼 생각이다. 따라서 애써 생각하지 않고자 최대한 타일 끝에 왼쪽 발바닥 붙이고, 남은 발바닥도 붙인 다음 구부려 두었던 무릎을 폈다. 이 순간은 수영을 할 때 가장 좋아하는 순간. 순식간에 치솟은 속도로 물속 맨 아래에서 먼 곳까지 뻗어나간다.

그 생각도 함께 머릿속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수영을 하면 뭘 쓰고 싶은 근육도 발달하는 걸까.





지난 금요일에는 자유형 스타트를 배웠다. 물 깊숙이 잠수한 다음 구부려 두었던 다리를 펴며 뻗어나가는 출발 기법이었다.


이날 나는 그 어떤 표현도 아쉬운 쾌감을 얻었다. 발바닥을 타일에 붙이고, 다리를 제대로 기역자로 만들수록 빠르게 뻗어나가는데, 기다려야 하는 순간과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순간이 연달아 찾아오는 걸 안 좋아하고는 못 버텼다. 쾌감 그 자체인 속도도 좋아 죽겠지만,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찰나에 내 몸은 물 가장 깊은 데에 있었다. 가장 깊은 데로 향하면서 수영장 바닥 타일에 얼굴을 처박기 직전이었다. 서서히 몸이 뜨며 자유형은 시작됐고, 이대로 물속에서 죽어도 좋겠다는 희열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그 희열은 찰나였고, 코끝이 수영장 바닥에 타일에 닿기 직전부터 번뜩 떠오른 장면 하나가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살점이 제대로 붙지 않은 인간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후 수영장 레인 끝에서 자유형 스타트를 준비할 때마다 살점을 하나씩 제 몸에 가져다 붙이더니, 물 가장 깊은 데에 다다를수록 그 인간은 차츰 인간으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결국, 자유형 스타트 수업이 십 분 정도 남았을 무렵엔 그 인간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인간의 이름은 비밀이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그 인간이 현실에는 없는, 내 머릿속에서 태어난, 정확히는 태어나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 그렇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수영을 할 때마다 소설 생각밖에 안 났다. 사실은 안다. 평영 발동작에 성공한 순간부터였다. 평영만으로 중급반 레인을 왕복하자마자 그 인간이 살아야 할 세상의 이름을 떠올렸다. 너무 폼 잡고 말한 것 같다. 그냥, 쓰고 싶은 소설 제목이 떠올랐다고 하면 될 것을.




살면서 소설은 딱 한 번 써 봤다. 그마저도 올해였다. 여태 나는 충실한 독자로 살아가며, 세상 모든 소설을 읽겠다는 포부나 다졌지, 소설을 쓰겠다는 오만에 시달린 적 없었다.


소설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신들린 사람이야말로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본다. 진심 어느 정도는 미친놈이어야 쓸 수 있는 것 같다. 이는 친구의 작업을 지켜보며 생긴 확신이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는 소설가고, 가장 가깝다 보니 그가 원고 마감을 할 때마다 내지르는 괴성을 실컷 들었다. 듣는 내내 속으로 몰래 생각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도 저 정도론 미쳐 있었겠지.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신의 영역이야. 신이라도 몸에 들어와야 쓸 수 있어. 하긴, 멀쩡한 사람은 세상을 창조 못 하지. 정치인들도 봐. 진영 상관없이 다들 조금은 미친 것 같잖아. 그러니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저러지.

물론, 나도 살짝 미친 사람이다. 지독한 우울증과 평생 싸우고 있으며, 취미는 자기 검열과 자기 비하니까. 게다가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의 이루어지지 않는 짝사랑을 글로 이뤄 주기도 했고, 좋아하는 연예인과 나를 이어 주는 팬픽도 써 보았으니 제대로 미칠 뻔한 적도 있었다고 슬그머니 주장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글은 전부 오천 자 미만의 글. 즉, 잡문이었다. 그런 내가 각 잡고 ‘이 글은 소설이야!’하고 쓴 건 올해가 처음인데, 그마저도 일하면서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배설하듯 썼다. 그러니까, 그마저도 스트레스로 사람이 살짝 돌았을 때 쓴 거였다. 사람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8만 자 훌쩍 넘는 경장편 소설을 썼던 걸까. 그뿐인가. 8만 자를 다 쓰고 나서 시놉시스까지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배설 행위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아직도 나는 그 순간을 허투루 기억하지 않는다.

소설은 정말 이상한 신의 영역이었다. 내 마음대로 떠올린 사람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결말에 이른다는 점이 특히 이상했다. 여태 내가 다룬 글은 마음대로 쓸수록 엉망이 되어, 절대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칙과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고. 그런데 소설은 ‘내 마음대로’가 가능했다. 어쩌면 소설로 돈 버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쓰지 않고, 어떤 원칙과 약속에 매달리듯 쓸 수도 있겠지만, 죄송하게도 알 바 아니었다. 난 소설로 돈 벌고 싶지 않으니까, 제멋대로 굴어도 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수영을 하는 내내 어떤 인간이 떠오르고, 제목도 떠오르더니 또 제멋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 한 줄조차 쓰지 않았다. 쓸까, 말까. 망설이긴 하지만, 망설임 끝에는 단호히 머릿속을 정돈했다. 절대 안 돼. 절대까진 아니고, 적어도 지금은 안 돼. 다음에, 아주 나중에 또 팔만 자 정도는 쏟아내야 덜 울 것 같을 때가 오면 그때 쓰자. 그때. 견딜 수 없을 만큼 미칠 것 같을 때 써 보자.




이쯤 되면 수영이 문제인 걸까. 평영 팔동작으로 애먹는 동안 머릿속에선 그 인간이 어떤 장면으로 뛰어들었다. 팔동작이 제대로 되질 않으면서 코와 입으로 물이 연거푸 들어오는 동안 그 인간은 내 머릿속 파도라도 되겠다는 양 마구 치고 들어왔다. 이런 장면도 써 줘. 저런 장면도 써 줘. 온갖 요구사항을 들고 내게로 헤엄쳐 왔다.

결국, 하도 물먹어서 뇌가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수업 마무리로 자유형 스타트 후 턴해서 배영하라는 말이 들렸고, 온갖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오로지 강사님 지시대로 움직였다. 물속 가장 깊은 데까지 밀고 들었다가 몸이 떠오를 즈음에 몸을 뒤집으면 그만이다. 턴 하나만큼은 자신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뒤집고, 수영장 천장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그 인간 옆으로 또 다른 인간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수영은 첼로나 바이올린에 필요한 근육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더 쓰고 싶어지는 팔 근육에도 도움이 된다. 첼로나 바이올린처럼 지금 당장 내 인생엔 하등 필요 없는 근육이 발달하는 게 분명하다고.



자유형 스타트에서 배영으로 턴하듯 생각을 뒤집어 봤다. 이 정도로 시달리면 그냥 떠오르는 대로 쓰면 되지, 왜 자꾸 튕겨 나오는 걸까. 돈 벌 목적도 아니고, 자기만족 용도라면 그냥 쓰지. 난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안 쓰고 싶어 하는 건데.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두 가지 문제가 내게 돌진해 왔다.

첫 번째.

나는 일을 해야 한다.

최근 회사로부터 일에만 집중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연애 금지, 친구도 지금 만나는 친구 이상으로 늘리기 금지, 책은 읽되 너무 어려운 책은 금지. 폼이 올라올 대로 올라왔으니 이대로 미친 듯이 달리자는 제안이었다. (혹시나 하고 덧붙이지만, 회사와 내 사이는 굉장히 좋다. 그냥, 저런 농담을 할 만큼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가 좋은 궤도에 올라탄 상태다.)

그러면 뭐, 소설 쓰기는 퇴근 후에 차근차근하면 되지 않나 싶을 수도 있겠으나. ……. 내 일 역시 글쓰기 영역에 가깝고, 그래,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글쓰기에 해당한다.

다만, 문학이 아니다. 나는 설계도를 작성한다. 설계도 작성 시 가장 중요한 것은 ‘적확’이다. 한 치 오차 없이 작성하여, 설계도를 받아 본 모두가 이해할 만한 작업 지시서를 완성해 내야 한다. 내 의도는 전부 설명되어야 하고, 설명할 수 없다면 제거해야 한다. 누군가가 작업 현장에서 대충 쓱 읽어도 ‘알겠어. 이런 걸 만들어 달라는 거지?’에 해당하는 글을 써야 한다. 즉, 현장과 내 설계도 사이에는 작은 차이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자칫이 찾아와도 어긋나선 안 된다. 책 읽을 시간 없이 바삐 사는 사람들도 알아먹을 만한 글. 어려운 단어는 배제하고 실생활에서 쓰는 단어 위주로 배치한 글. 시간 내서 읽는 글이 아니라, 시간을 최대한 아끼고자 읽는 글. 그게 내 일이고, 내 글이다.

그런데 문학은 어떠한가.

마음껏 해석하고 상상하도록 최대한 여지를 넓히지 않나. 난 독자에게 주어지는 공백이 좋아서 문학에 환장하지만, 때로는 그런 나 때문에 회사가 환장을 한다. 지난봄과 여름, 소설처럼 설계도를 쓴다는 피드백에 반항하듯 경장편 소설을 썼었다. 문제는 쓸수록 내 설계도에 문학적이고 현학적이라는 평이 더 진득하게 붙었고, 틀림없는 설계도로 돌아오는 데에 한 달이 걸렸다. 육 년이나 설계도를 만들며 살았는데.

여기서 두 번째 문제.

수영을 할 때만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안 되겠고, 설계도와 소설 사이에서 무게 조절하든 어떻게 해서든 써 봐야지! 하고 집에 와서 노트북 켜면 딱 수영장에서 떠올린 만큼만 적힌다. 이후로는 쭉 빈 페이지다. 지난번에 썼던 소설은 한글 파일을 켜기만 해도 써져서 내가 드디어 손댈 수 없을 만큼 미친 줄 알았는데, 이번에 쓰고 싶은 소설은 수영장에서만 살아 숨 쉬는 탓에 받아 적듯이 적어야만 한다. 문제는 그게 취미보다는 어떤 일로 느껴져서 재미가 없다.

실은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어쩌면 가장 큰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럼에도 쓰고 싶다는 거다. 며칠 뒤면 짧은 휴가가 끝나고, 앞으로 몇 달간은 설계도 수정 작업에 공들여야 하건만, 수영만 했다 하면 어떤 소설이 쓰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수영 바보의 에세이 도전기와 책 리뷰로만 표출하기로 한 글쓰기 욕구가 또 쉴 틈 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아무리 막아봐도 손 틈으로 물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물속이 영감이라도 되는 양. 수영장 한 바퀴 돌 때마다 어떤 인간이 나 좀 태어나게 해 달라고 남의 머릿속을 헤엄친다. 때로는 그 헤엄이 파도까지 된다. 나보다 더 제멋대로인 인간을 맞닥뜨린 지금,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거짓말이다.

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토요일 연재
이전 05화내가 나를 싫어하느라 가려진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