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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얼 Oct 23. 2021

버스정류장

요 며칠 크게 앓았다.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아 내 하늘은 반은 빙글빙글 돌고 반은 어두컴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몸도 가누지 못하고 누워있는 와중에 나는 살 것을 궁리했다. 살 궁리를 요리조리하면서 한편으로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다 아우성칠 땐 언제고 진짜 죽을 만큼 아프니 살고 싶어 졌으니 말이다.


진짜 몸이 아프고 나니 겁이 덜컥 났다. 내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내가 일어나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어 똑바로 누운 채로 생각을 정리했다. 뭐라도 옮겨 적어놓고 싶지만 그것은 기운이 생길 때 하기로 하고 일단 미리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얼 정리하지? 정리할 문제도 재산도 변변히 남 앞에 내세워 정리할 거리도 없으면서 나는 진짜 내 손이 닿을 수 없을 때가 걱정이 되어 뭐라도 정리해 보기로 했다.


10년이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적금 한번 들지 못한 내가 물려줄 재산이야 있을 리 만무하지만. 잔고라고는 얼마 있지도 않은 내 통장이 생활에 보탬이 된다면 알맞게 쓰게 하고 싶었다. 성실하게 부은 적금은 없지만 그래도 매달 꼬박꼬박 넣어놓은 갖가지 질병의 보험금은 꽤 될 거라 생각했다. 적금도 붓지 않는 이가 무슨 보험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랬다. 늘 어딘가 떠날 일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혼자가 될 일을 걱정했던 사람처럼 욜로(YOLO)를 즐기는 척하면서도 아프고 초라해질 언젠가의 나 자신을 걱정해 각종 보험에 나를 의지했다. 사람도 일도 아니고 얼마의 보험이 그래도 힘없고 초라한 나를 얄팍하게 보호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나 보다. 


지금 내가 당장 눈을 감는다면 질병에 의한 죽음이니 보험금이 나오는데 무리가 없을 거란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얼마가 될진 모르지만 내 알량한 잔고보다는 훨씬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남길 것도 없는 나의 이 볼품없는 모든 것들은 내 남동생이 해주길 처분해 주길 바랐다. 그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가장 합리적이고 옳게 할 거란 믿음도 있었지만 내가 몸부림치며 버텨온 이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봐준 사람으로 그에게는 그럴 권한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픈 내 곁을 내내 지켰다. 옆에 앉아 밤을 새우고 밥을 떠먹이고 약을 챙기는 일을 하진 않았지만, 그는 내가 어둠 속에 파묻혀 소리조차 못 내고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모양을 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알아보고 진흙탕 같은 그곳에 손을 뻗어 헤집어 나를 끄집어냈다. 내가 그 긴긴 터널을 빠져나올 때까지 터널 밖에서 밝은 등을 들고 묵묵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불빛에 의지해 그 터널의 끝을 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버스정류장에 기다리는 네가 있어 나는 길을 잃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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