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질척이는 아스팔트를 걸으며 길을 가는데 우연히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번 주말에 비 엄청 온다는데."
"이야,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캠핑을 가야 하는데."
으음?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캠핑 가는 건가? 초보 캠핑러인 내 입장에서는 제법 참신한 발상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날이 좋아야만 캠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초짜다운 발상이다. 날이 좋아서 혹은 날이 좋지 않아서 그 모든 날이 너와 함께라서 좋았다는 어느 드라마 명대사처럼, 진짜 캠핑러에겐 날이 좋든 좋지 않든 캠핑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날이 없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가 제법 여행의 중수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던 나는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날씨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장마라면 얘기가 좀 달라졌다. 잠깐잠깐 비가 오는 거면 몰라도 지속적으로 비가 내리면 활동성이 제약되지 않는가. 게다가 우리가 예약한 남해안 지역은 중국에 이례적인 홍수를 불러일으킨 굉장한 장마전선의 북상으로 호우경보가 발효 중이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길게 예약한 휴가 일정을 취소하자니, 앞으로 언제 긴 시간을 낼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상태에서 취소하기도 애매한 상황. 남은 방법은 콘도에 들어가 하염없이 비 내리는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일단 강행하고 보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부터 맑았던 날씨는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갈수록 흐려지더니 대전을 지나 통영 대전 고속도로를 지날 무렵 빗방울이 떨어졌고, 산천을 지나서부터는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장마 여행.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워두고 파노라마 선루프의 유리창만 닫아놓은 채 의자를 뒤로 젖혀 누워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싶은 감상에 젖기도 전에,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장마라도 설마 한시도 안 쉬고 비가 내리겠냐고 생각했던 우리의 안일한 긍정적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는 첫 이틀간 정말 쉬지 않고 내렸다. 폭우처럼 쏟아지다가 부슬거리다가를 반복할 뿐. 폭우시에는 실내에 얌전히 앉아 비 내리는 바깥을 감상하다가그 강도가 좀 약해졌을 때 우산을 쓰고 콘도 주변을 산책하는 게 최선이었다. 비가 계속 오니 할 일이 별로 없어져서, 우리의 여행속도는 하염없이 늘어졌다. 타의적으로 시골 바닷가 마을 주민의 쉬는 날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뭔가 요양 같기도 휴양 같기도 한 것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마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예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에 심취해 있을 때, '나에게도 언젠가 하루키처럼 상주하는 여행자로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날들이 왔으면 좋겠다'던 그 시절의 단상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내와 단 둘이 유럽으로 훌쩍 떠난 그의 용기에 감탄하면서.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을 여행하게 되면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가 굉장한 액티비티를 즐기는 스타일도 일단 현재는 아니고(아기가 있으므로), 비를 뚫으면서까지 그 지역의 명소를 반드시 방문하겠다는 관광객 스타일도 아니니 일단 지금의 모습,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비 내리는 걸 멍 때리며 뜨거운 커피(아기는 코코아)를 마시는 이 모습이 굉장히 현지인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는데 문득, 이거야말로 진정한 사치가 아닌가(!)하는 깨달음이(?) 왔다. 그 먼 곳에서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한껏 누리며 시간을 왕창 허비하는 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