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가왕'은 가급적 챙겨보려고 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초반에는 단순한 재미로 봤는데, 인기가 상승하여 장수 프로그램이 되면서 등장 가수도 많아져 재야의 숨은 고수들이 총출동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훌륭한 노래를 듣는 재미도 있지만 특히 근래 들어 흥미로운 건, '어떻게 가리고 숨겨도 다 드러나는 고수들의 아우라 혹은 카리스마'다. 아무리 꽁꽁 숨겨도 노래 한마디에, 서 있는 자세와 제스처에서 스며나오는 포스랄까, 이런 것들까지는 아무리 해도 숨겨지지 않는 거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그들만의 매력에 반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이 저런 아우라를 지니기 위해 살아왔을 인생의 과정이 궁금해진다. 그런 아우라를 갖고자 의도하여 노력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어제의 나에게 안주하지 않기 위해 부단한 자기 개선을 해오지 않았더라면 저런 깊이가 나왔을까 싶다. 그러면서 늘 생각한다. 저 정도의 깊이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깊이 없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깊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상당히 오래 살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던 중 부고를 알리는 문자를 받았다. 처음에는 두 눈을 의심했다. 퇴직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의 부고였기 때문인데, 적어도 내 기억에 그 분은 어디가 아프거나 지병이 있던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늘 약주를 즐기며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인생의 소소한 낙으로 삼아 살아가는 분이었다. 부고로 인해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면 약주를 지나치게 하여 건강이 악화된 것은 아닐까 싶은 정도. 헛헛한 마음을 안고 장례식장에 가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예상대로 약주가 그토록 이른 죽음의 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병이 있었고, 병과 함께 살아왔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보통의 일상적인 삶을 살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분은 내가 생각했던 만큼 깊이가 없는 분이 아니었고, 남들 이야기를 즐겨 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한 그 분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버릇이 마음 한 켠에 남아있었나보다. 반성했다.
지인이든 아니든 부고는 그 자체로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이켜보게 만든다. 이번에는 '정말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겠어'하는 경각심이 주로 들었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깊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느 정도는 나이가 들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야 하겠는데, 맨날 아파서 건강관리만 하다가 그 너머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도 어쩐지 좀 서글프지 않느냔 말이다.
요즘은 하도 체력이 저하되어서-이제 일상이라 특별하지도 않지만-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무리를 해도 바로 면역력이 떨어져 빌빌거리는데, 그러다보니 5년 전 병원 신세를 졌을 때를 종종 떠올리게 된다. 그 때는 상황이 꽤나 안좋았기 때문에, '만약 다시 건강해진다면 해보고 싶은 모든 것을 해봐야지, 이제 주저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어'라고 다짐했는데 지금와서 보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 물론, 5년 간 엄청난 변화들이 있긴 했다. 결혼을 선택했고, 그래서 남편과 함께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법적 가족들이 생겼고, 정말로 피가 섞인 가족-아기가 태어났다. 임신과 동시에 휴직을 하고 다시 복직을 하면서 워킹맘이 되었다. 집을 계약했고 대출금을 갚느라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변화들 말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하는 것들은 내면적인 부분이다. 좀 더 자기 중심을 잡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도 남들과 처지를 비교한다. 물질적인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그 어느때보다 연연한다.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느낄 줄 알아야지 하면서도 싫은 사람에게는 가차없다. 권위앞에 너무 주눅들지 말아야지 하면서 높은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허리가 굽어진다.
지나친 자기비하에서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변명을 하자면 그래도 나이를 먹긴 먹었다고 달라지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모든 사람들한테 잘보이려 하지 않는다. 싫은 사람에게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윗사람이 예전만큼 어렵지는 않다. 남들한테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지 않는다. 일과 육아의 병행으로 너무나 바쁜 나머지 남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진다. 원래 나이 먹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역시 나이 먹는게 나쁘지만은 않다. 적어도 20대 때보다 30대 때의 나는 좀 더 깊이가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