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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고운 Nov 29. 2019

그 너머를 꿈꾸기 위한 조건


아주 오래전 봤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이런 말을 했다. "왜 나는 황후가 쉽게 되지 못했을까, 쉽게 되었더라면 그 너머를 꿈꿀 수 있었을텐데." 이 드라마를 매우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공헌을 했던 미실은 황후가 되고 싶었으나(황후인지 왕비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국 그 원을 이루지 못한다. 그 말을 듣고 크게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저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앉았더라면 신라를 더욱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사람이 어느정도 그 시기에 어울리는 발전을 하고 자리를 찾아야 그 다음 단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건 그 드라마에서나 그랬다는 말이고 실제 인물은 어땠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 당시 느꼈던 건 인생의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에 어울리는 발전을 해야겠다는 거였다. 쉽게 말해서 나이에 걸맞는 위치와 품격은 갖추자는 취지였는데, 말이야 쉽지, 살아보니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어렵더라는 말이다. 나는 내 나이 마흔 정도 즈음에는 굉장히 박식해져 있고, 무대공포증은 없이 무난하게 발표를 할 수 있고(때로는 유머를 섞어가며 능수능란하게),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고수 반열의 초입에 들어서 있을 줄 알았다. 


요새는 이 모든 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중이다. 에머슨이 그랬던가, '광활한 우주는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자기 몫으로 주어진 땅에서 직접 밭을 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옥수수 낟알 하나도 절대 얻을 수 없다'고. 요컨대 내 모습이 그렇다.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박식해져 있을 줄 알았고, 여유롭게 발표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고, 한 분야의 고수가 되어 있을 줄 안 것이다. 착각이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아니, 대부분이다. 단 한가지 얻은 위안이라면 '노력하지 않고는 옛날과 똑같은 나'로 남을 거라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노력을 하면 될텐데, 그 노력을 한다는 것도 어쩌면 선택된 자들에게나 주어진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니컬하고 현실안주적인 결론에 도달한 건 아마도 현재의 내 건강상태가 녹록지 않기 때문일 거다. 몸이 어딘가가 아프다보면 무언가를 위해 노력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사치다. 여력이 있다면 몸의 회복을 위해 애를 써야 한다.


몇 달 전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일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하는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마음이 조금 달랐다.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나니, 몇 년 간이나 마음속에 '내 일을 남에게 넘겼다는' 부채가 생겨버리고 만 것이다. 몇 년씩이나 마음의 부채를 안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결국 발표를 맡았지만 그 부담감이 가시는 게 아니었다. 가시기는커녕 날이 다가올수록 그 부담감만 계속 커져갔고, 엄청나게 많이 연습한 거에 비해 결국 그 중압감을 떨치지 못하고 굉장히 떨면서 발표를 했다. 


적어도 남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으니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않았는가, 떨기는 했어도 그 순간 두려움과 중압감에 온전히 집어먹히지는 않고 그래도 끝까지 할 말은 다 하지 않았는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어쨌든 내가 할 일은 끝내지 않았는가 등등 온갖 위로를 스스로 해보아도 결국 남는 건 씁쓸함이었다. 하여간 그 때를 기억하면 마음 한켠이 쓰라리다. 이 쓰라림은 분명 나 자신이 원하는 내가 아닐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만약 내가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싫었더라면 더 많은 발표 경험, 무대 경험을 하고 마인드 컨트롤 훈련도 했어야 했다. 그저 막연하게 '아이를 낳았는데 발표 중압감 하나 극복하지 못할까' 하는 근거없는 자신감만 가졌던 모양이다. 


그런 저런 중압감들이 느껴지는 상황들 속에서 계속 일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다. 머리로는 '이 정도 일들이야 처리할 수 있어'였는데, 몸에서 계속 안 좋다고 신호가 오더니 결국 폐렴이란다. 정확히 오 년 전 간염 진단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스트레스의 한계치와 몸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한계치는 확연히 다른 듯하다. 한 템포 쉬어가라는 몸의 뜻이겠거니 하고 진단서를 내고 일주일 쉬기로 했다. 스스로는 나 자신을 많이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부분이 많은가보다. 적어도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몸의 반응은 크게 진보된 것이 없어보인다. 


스스로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용기일지 모른다. 또한 용기는 두려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나란 사람의 그릇이 작을지도 모른다는,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두려움이다. 무엇보다 큰 두려움은 그것을 한계로 받아들이고 나면 거기에 익숙해져 더 노력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건 크게 두려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계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노력하지 않고 있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여전히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도, 그에 따르는 행동도 일단 건강할 때 좀 더 수월한 것이 사실이다. 어제보다 건강한 나로 인생 모토를 바꿀 때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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