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여름날
방학을 하면 아이들은 할머니 댁에서 며칠씩 묵고 온다. 이번 여름에는 작은 아이가 할머니 댁에 친척 동생이랑 함께 다녀왔다. 재밌는 일이 있으면 재잘재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아이는 이번 할머니 댁 나들이도 신이 나서 얘기한다. 가는 날이 마침 장날이라 할머니와 친척 동생과 함께 양양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준다. 장을 구경을 하고 나서 국숫집에 가서 냉국수를 먹었는데 그 집이 맛집이라며, 아니 두릅 튀김이 더 맛있었다고, 다음에 엄마랑 다시 가고 싶다고 말한다. 수박을 좋아하는 아이는 할머니한테 수박을 사달라고 했단다. 8월 초 뜨거운 한낮 장본 보따리들과 수박 한 덩이 그리고 복숭아 3만 원어치를 사서 할머니와 두 아이가 낑낑거리며 들고 메고 버스를 타고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서 집에 갔단다. 그리고 뻗었다고. 동생과 낮잠을 한숨씩 자고 일어나니 할머니가 수박을 잘라 주셨단다. 또 한 번의 감탄사를 연발한다. 수박을 잘 골랐다고, 달고 맛났다고 말이다.
여름의 무더위에 지쳐갈 즘 태풍이 왔고 그렇게 여름을 관통해 지나갔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이 맘 때면 항상 툇마루에 앉아 비 구경을 하던 유년 시절 풍경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비릿한 여름비 냄새와 함께 말이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조산에 있는 친척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엄마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시골마을이었다. 엄마는 어린 두 동생을 포함하여 방학 동안 우리 4형제를 다 돌보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점심을 같이 먹고 엄마는 집으로 떠나가고 혼자 덩그러니 할머니 댁으로 남겨진 나는 방학 내 그곳에 머물렀다. 어려서 말수도 없고 도통 그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나를 엄마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색은 안 하지만 어린 나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기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가기 싫어도 보내질 것을 알았기에. 어린 나이에도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것일까. 어떨 때는 눈치가 없다가도 어떨 때는 너무 눈치를 보던 아이였던 나. 여름비 말고도 또 생각나는 다른 풍경은 커다란 옥수수 수풀과 소가 있던 부엌과 다락방이 희미하게 떠오르며 여름비 내리는 모습을 온종일 지켜보던 기억도 난다. 짤막짤막하게 떠올려지는 수채화 같은 모습들이 단편영화처럼 지나간다.
하루는 할머니 따라 한참을 걸어 옥수수밭에 갔다. 내 키보다 큰 옥수수밭에 들어서면 커다란 하늘도 작아졌다. 할머니는 수풀을 헤치며 주름진 손으로 옥수수를 뚝뚝 따냈다. 할머니는 그렇게 따낸 새파란 것들을 집으로 가져와 껍질을 벗겨 가마솥에 가득 넣고 쪄주었다. 갓 쪄낸 옥수수를 할머니는 반으로 뚝 잘라 호호 불어 한 김 식힌 뒤 내 손에 쥐여주셨다. 그러면 나는 오물오물 염소새끼마냥 맛나게 먹었다. 어릴 적 입 짧은 내게 여름 옥수수는 달았다. 다른 날은 그 가마솥에 감자를 쪄주기도 하셨다. 뜨끈한 김이 오르는 감자를 껍질을 벗겨 설탕을 뿌려주시면 그게 또 그렇게 달았는데. 글을 쓰는 중에도 포실한 감자가 그려진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방에 앉아 열린 창을 통해 비 내리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나가 놀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시골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배 깔고 바닥에 누워 보기도 하고 혼자 뒹굴뒹굴 굴러보기도 하고 그래도 심심하면 그냥 툇마루에 걸터앉아 비가 땅바닥에 타닥타닥 튀는 것을 하루 종일 구경했다.
참, 할머니 집에는 부엌에 외양간이 있었다. 할머니는 종일 부엌에서 밥도 하고 일도 하시는데 소가 무서운 나는 부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쩌다 부엌에 용기를 내고 들어가도 덩치 큰 소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금살금 걸어 다녔다. 소가 누워있는 곳을 지나면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에 올라갈 수도 있었는데 방학에는 무서워서 한 번도 못 올라갔다. 대신 명절 때 오빠나 사촌 오빠들이 오면 함께 올라갈 수 있었다. 부엌에는 소와 다락방 말고도 광이 하나 있었다.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할머니는 간혹 사과를 꺼내주시기도 하고 달달한 사탕을 꺼내주시고 했다. 비밀 창고 같았던 광이 열리는 날은 그래도 할머니 댁에서 지낼만했다.
8월이 되면 유년 시절 그 여름 내음이 그리워진다. 할머니도 그립고 무서웠던 소도 그립고 올라가지 못하고 쳐다만 보던 다락방도 그립다. 무성한 옥수수밭 사잇길에서 바라보던 작은 하늘도 그립다. 다시 갈 수 없는 그 시간들, 지금과는 다른 빛깔의 시간들, 대신 오늘은 옥수수를 쪄야겠다. 그러면 옥수수 사잇길에 다시 서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