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없는 집으로 시집온 지 벌써 21년이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아버님이 큰댁으로 제사를 다니셨는데 이제는 연로하셔서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신다. 명절에 제사가 없기에 나는 21년간 참 편한 며느리였다. 연휴 첫날 직장에서 공구로 주문해 둔 머루포도와 애플망고를 들고 가족들과 시댁에 갔다. 차로 10분 거리 시댁에는 벌써 조카들이 와서 시끌벅적했다.
어머님은 식구들 점심으로 김치를 포기째 넣고 목살도 덩어리로 넣어 김치찌개를 끓이고 계셨다. 1시간 넘게 끓여서 도톰한 목살은 푹 고아져 물렁해서 먹기 좋았다. 물에 들어간 고기는 잘 못 먹는 나에게도 맛났다. 김치찌개로 밥 한 공기 뚝딱하고 어머님이 이른 아침 양양 떡집에서 공수해 오신 송편도 맛보았다. 밤송편, 검정콩 송편, 꿀떡을 골고루 사 오셨는데 나는 밤송편을 좋아한다. 고소한 밤이 들어간 송편은 씹을수록 고소하다. 아이들은 달달한 꿀떡을 좋아하고 아버님과 어머님은 콩송편을 좋아하신다. 아이들 어릴 적에는 가족들이 모두 둘러앉아 송편 빚던 추억이 있었다. 아이들이 크니 떡을 만들어도 먹는 식구가 없다. 그렇다고 추석에 송편이 빠지면 섭섭하니 떡집에서 이렇게 한 팩씩 사 와서 먹는다.
식사 후 시댁에서 제일 큰 냄비를 꺼내 놓고 큼직한 무 2개를 탕국용으로 썰어 소고기 탕국을 끓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마당에 가스를 연결해서 가마솥에 탕국을 끓이셨는데 시누이네가 명절에 바빠서 못 온다고 하니 올해는 가마솥을 걸진 않으셨다. 그리고 시어머님이 명절 전에 미리 쌀 때 사서 얼려놓은 대왕문어를 썰어 놓았다. 문어는 어머님이 준비하시는 명절 음식의 핵심이다. 아마도 문어 가게에서 제일 큰 걸로 사 오시는 듯하다. 올해는 중간 사이즈로 2개를 사 오였는데 대식구들이 이틀을 먹고도 집에 싸왔으니 크긴 크다. 그리고 어디선가 얻어 놓은 은어를 튀겨보라고 하신다. 내장까지 깨끗이 손질된 은어는 소주에 잘 담겨있었다. 시어머님은 생선이나 고기의 잡내 제거를 위해 소주를 주로 사용하신다. 작은방에 소주 상자가 짝으로 놓여있다. 은어에 가루를 묻히고 튀김가루를 개서 바삭하게 튀겨냈다. 튀겨냈어도 민물고기라 나는 약간 비렸지만 식구들은 맛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명절 당일에는 뭉근하게 푹 끓인 소고기 탕국과 문어숙회, 시누이가 양념에 재어온 LA갈비를 굽고 은어튀김과 시장표 전을 함께 상에 올렸다. 시골에서 연한 것으로 따와 말렸다는 고사리도 볶아 함께 냈다. 어머님은 며느리 힘들까 봐 전을 구워라 하시진 않는다. 대신 아침 댓바람부터 장에 가서 아들 좋아하는 동그랑땡과 새우튀김을, 손녀들 좋아하는 고구마튀김과 오징어튀김을 줄 서서 사 오신다. 점점 해가 갈수록 시장 튀김 가게 줄이 길어진다고 하신다. 요즘은 집에서 전을 부치는 집은 줄고 시장에서 사는 집이 늘고 있단다. 어머님은 오늘도 역시 식구들 수대로 고봉밥을 퍼서 상에 놓으신다. 아이들은 눈치도 없이 서로 밥을 덜어달라고 하는 게 괜히 죄송해서, 며느리가 있는데도 아직도 주방에서 손을 못 놓으시는 어머님께 더 죄송해서 며느리인 나는 고봉밥을 받아 감사한 마음으로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아침을 물리고 다시 점심을 차리고 낮잠을 한숨 자고 나니 추석날 저녁이 되었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어머님은 남은 음식을 소분해 담기 시작하신다. 탕국을 담고 고사리와 문어를 싸고 남은 튀김도 넣어주신다. 거기에 햅쌀도 한 보따리 챙겨주신다. 바리바리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 평소보다 커다란 보름달이 대포 바다에 걸쳐있었다. 약간 붉은 기를 머금은 보름달을 보며 가족의 안위를 빌어본다. 명절이 예전 명절 같지 않고 그저 연휴같이 느껴졌는데 바다에 낮게, 하지만 환하게 빛나는 달빛을 보자 추석이구나 실감한다.
제사 많은 친정과 달리 음식을 많이 안 해서 편하지만 어떨 때는 제사 음식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일 년에 12번의 제사와 2번의 명절을 지내던 친정에서는 명절 끝이면 냄비에 김치 한 포기 썰어 넣고 남은 음식들- 나물이며 전이며 생선을 넣고-로 섞어 찌개를 끓였다. 그 옛날에는 그 찌개가 싫었는데 가끔은 그 찌개에서 두부 전과 생선을 골라 먹던 게 생각나기도 한다. 제사상 음식은 간을 보면 안 된다고 해서 감으로 맛을 낸 무나물도 그립고 제사상에 올리던 유독 뽀얀 삶은 계란도 떠오른다. 살면서 그리운 것들이 많아지면 나이가 드는 것이라는데......
추석 다음날,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었더니 기름기를 싹 뺀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시댁에서 공수해 온 햅쌀을 씻어 앉힌다. 새로 개업한 마트에서 미리 사다 놓은 콩나물을 씻는다. 잘라 놓은 김치를 냄비에 넣고 김치 국물도 오늘은 두 국자를 넣고 끓인다. 끓어오르면 콩나물을 넣고 다시 한소끔 끓인다. 평소엔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지만 오늘은 선물로 들어온 다시 팩을 넣고 끓여본다. 어느 정도 끓었다 싶으면 양파도 넣고 파도 넣는다. 신 김치를 넣어 신맛이 강했지만 설탕은 넣지 않았다. 제대로 신맛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님이 싸주신 문어를 꺼내 양배추와 오이, 당근, 양파를 채 썰어 새콤달콤 문어를 무쳐낸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치 콩나물국 한 숟가락 먹으니 기름진 속이 내려가는 것 같다. 여기에 새콤한 문어 무침을 먹으니 더 상큼하다. 시큼한 김치 콩나물국에 고슬고슬한 밥을 말아먹는다. 큰아이도 작은 아이도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고 부부만 남아 명절 끝 김치 콩나물국을 먹는다. 식사 후 머루포도를 먹으며 조용히 연휴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