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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 Oct 20. 2023

다시 찾은 주방

일주일 동안 밥을 할 수 없었다. 싱크대가 막혀서 역류한 바람에 싱크대 바닥에 연결되어 있던 인덕션 코드에 물이 들어갔는지 차단기는 내려갔고... 그렇게 일주일간 밥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싱크대 물이 잘 안 빠지기 시작했다. 뚫어펑도 사서 해보았지만 시원하게 물이 빠지지 않았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정말 제대로 꽉 막혔는지 물이 빠지는 않는 거다. 체념하고 남편에게 얘기했고 남편이 이리저리 손을 봐주었고 물은 내려갔다. 다행이다 생각하고 설거지를 하는데! 물이 내려간 것이 아니라 바닥에 다 쏟아진 것이었다. 물 내려가는 호스가 빠져 주방 바닥이 그야말로 물바다를 이루었다.


살다가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 오밤중의 물난리로 아이까지 동원해 물을 닦아냈다. 물이 바닥으로 쏟아지면서 주방 차단기가 내려갔고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전원이 꺼졌다. 다시 차단기를 올리니 다행히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전원은 들어왔지만 인덕션을 켜려니 무서웠다. 주방 물난리를 정리하였지만 주방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인덕션도 스톱, 싱크대도 스톱, 나의 밥도 올스톱.


주말에는 출근이라 어떻게 손쓸 수 없었고 일요일은 피곤해서 주방을 그냥 두었다. 남편은 쿠팡에 싱크대 뚫는 기계를 주문했으니 좀 기다리고 한다. 주말 끼니는 컵라면도 먹고 외식도 하였다. 이번주에는 아침은 되도록 간단하게 김치와 김, 햇반을 먹거나 두유로 때웠다. 아침에는 밥을 꼭 먹어야 하는 아이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점심은 각자 급식이나 회사에서, 저녁은 아이는 포장음식을 먹거나 나는 샐러드를 사서 먹었다. 사실 방학에 체중관리한다고 큰아이가 사다 놓은 닭가슴살이 냉동실에 가득이라 이참에 소진할 겸 샐러드와 닭가슴살로 저녁을 먹었다. 냉장고에 샐러드 채소가 가득한데 사서 먹으려니 맘이 불편했다. 하지만 씻으려면 화장실 개수대를 이용해야 하는데 먹거리를 화장실에서 씻자니 뭔가 찜찜했다.


어제 쿠팡에서 남편이 주문한 기계가 도착했다. 하지만 웬걸 사이즈가 안 맞는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람을 불렀고 얼마 안 되어 싱크대는 "뻥" 뚫렸다. 한 시간도 안 되는 데 15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깝기도 했지만 15만 원에 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니 기쁘기도 하였다. 일주일 동안 싱크대만 바라보면 한숨이 나왔는데 "콸콸" 내려가는 물소리가 나의 막힌 속도 뻥 뚫리게 해 주었다. 하지만 밥을 안 하니 그 생활도 심플하고 좋았다. (이런 이중적인 감정!)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주방에 들어섰다. 고구마 한 개를 깎아 쌀과 함께 앉혀 고구마밥을 하고 인덕션에 냄비도 올렸다. 마른미역도 물에 불려 들기름에 볶다가 들깨미역국도 끓였다. 한동안 바라만 보던 샐러드 야채도 식초물에 담갔다 살살 헹구어 냈다. 빠알간 방울토마토를 곁들여 샐러드도 담고 고구마밥에 들깨미역국 그리고 작게 썰은 김치까지 올려 밥상을 차렸다. 주방 가득 채워진 밥냄새가 따스하고 다정하다. 이런 맛에 사는 거지 싶다. 출근길로 바쁜 아침이지만 설거지도 후다닥 하고 더 해맑아진 나의 주방을 바라보자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 steveungerman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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