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억을 위한 전략적 재독 독서법
학사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반도 못 보고는 땅에 던지며 말했다. "책만 덮으면 바로 잊어버리는데, 본들 무슨 소용인가?" 현곡 조위한이 말했다. "사람이 밥을 먹어도 뱃속에 계속 머물려 둘 수는 없다네. 하지만 정채로운 기운은 또한 능히 신체를 윤택하게 하지 않는가. 책을 읽어 비록 잊는다 해도 절로 진보하는 보람이 있을 것일세." 말을 잘했다고 할 만하다.
- 이익 <성호사설> 중 '조현곡' -
[내가 이럴라고 책을 읽었나....]
책을 읽다 보면 허탈한 마음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가 있다. 책장을 덮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하얗게 포맷되는 경우가 그렇다. 어떤 책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망각에 최적화되어있다. 뭔가 열심히 읽기는 했는데 기억나는게 없는 경우가 있다. 허무하다.
사실 이는 굉장히 위험하다. 불타는 독서 의지를 영혼까지 끌어모아 완독했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으면 어떻겠는가? 다시는 책을 거들떠도 보기 싫어질 것이다. "내가 해봤는데 역시 책은 나랑 안 맞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독서를 하지 않을 명분이 생긴다. 좌절감이 독서인생에 있어 발목을 잡게 된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지어다]
최우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좌절하지 말지어다." 절대로 절망하지 말라. 다독가들 역시 이런 경우가 빈번하다.
첫 번째로 이런 경우 당신의 잘못이 아닌 경우도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대부분의 경우 외서에 대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할 때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이는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지어다." 이때는 그저 쿨하게 같은 책이지만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한 책을 찾아보거나, 영어실력이 된다면 원서를 읽어보자. 그게 아니라면 그냥 쿨하게 그 책을 놓아주자. 꼭 그 책이 아니어도 세상에 읽을 책은 수없이 많다.
두 번째 경우는 냉정히 판단했을 때, 분명 당신의 잘못인 경우다. 책의 난이도는 배경지식에 따라 상대적이다. 무슨 말이냐면, 같은 책을 접하더라도 사람마다 체감적 난이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의학 관련 책이 있다고 치자. 의사들이 읽을 때 그 책은 굉장히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의학과는 거리가 먼 문과생이 읽을 때는 굉장히 어려울 수 있다. 한 마디로 배경지식의 차이라는 것이다. 역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좌절하지 말지어다." 그저 쿨하게 기초부터 다져나가면 된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에게 마라톤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때는 해당 분야의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다루는 분야가 넓어서 확장성이 좋은 교과서적인 책 혹은 교양 입문서부터 읽는 것이 좋다. 나는 이런 책을 '씨앗도서'라고 칭한다. 일단은 씨앗을 심어야 그 씨앗이 자라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타고, 가지가 뻗어나가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를 맺는다. 밑바닥이 탄탄해야 건물을 높이 올릴 수 있다.
[당신의 뇌를 믿어라: 뇌의 가소성]
뇌과학적으로 특정 분야에 대해 심도 있는 공부와 강도 높은 훈련을 하게 되면 신경섬유의 연결이 촘촘해져서 뇌가 해부학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를 '뇌의 가소성'이라고 칭한다. 맥락적으로 특정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이 쌓이면 해당 분야의 정보를 처리하는 시냅스 간의 연결망이 확장되면서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향으로 뇌가 변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영성, 신영준 작가의 <완벽한 공부법>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그러니 책을 읽어도 망각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좌절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해당 분야에 대한 독서를 꾸준히 하면 된다. 당신의 뇌를 믿어라.
[망각하는 인간]
이제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위에서 밝힌 두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실 인간의 뇌를 가졌다면 망각은 너무도 당연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니 우리는 망각해야지만 생존할 수 있다. 진화론적으로 우리는 망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망각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삶이 얼마나 힘들어지겠는가? 때로는 잊어버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경우가 많다. 기억연구 분야의 대가인 헤르만 에빙하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학습을 하고 10분 후부터 망각이 시작되며 1시간 뒤에는 50%, 하루 뒤에는 70%, 그리고 한 달 뒤에는 80%를 망각한다고 한다(고영성, 신영준 <완벽한 공부법> p101). 그러니 책장을 덮고 나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망각한다, 고로 재독한다]
따라서 독서는 어찌 보면 망각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잊어버리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넘기는 전략적인 독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전략적인 독서는 '재독'에 대한 것이다. 결국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복 숙달하는 방법밖에 없고, 이를 독서법으로 표현하면 '재독(다시 읽기)'이다.
[이정표를 심어라: 기억을 붙잡기 위한 전략적 독서법]
그렇다면 어떻게 '재독'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나의 방법을 간단히 소개해보겠다. 일단 나는 처음 읽을 때부터 '재독'을 염두에 두고 중요한 부분마다 이정표를 남기는 작업을 하며 책을 읽는다.
(1) 1단계: 책을 처음 펼치기 전에 사이드에 자를 대고 2.5cm 간격의 줄을 긋는다.
그렇게 하면 평균적으로 8~9개 정도의 여백이 나온다. 맨 위칸부터 3개 칸은 파란색 포스트잇을 붙일 구간이다. 그다음 3칸은 빨간색 포스트잇을 붙일 구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2~3개 칸은 노란색 포스트잇을 붙일 구간이다. 선을 그을 때 추천하는 방법은 위에서부터 3~4개 정도의 칸을 만들고 밑에서부터 다시 긋는 것이다. 그래야 중간 정도에 2.5cm가 아닌 여백이 생기는데, 향후에 이 부분을 잡고 책을 수월히 넘길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포스트잇이 여백 없이 덕지덕지 붙게되어 책장을 넘기기가 불편해진다.)
아직 정확히 이해가 안가겠지만 아래 내용을 다 읽고, 사진을 보게 되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될 테니 세부적인 설명은 생략하겠다.
(2) 2단계: 줄을 긋고 나서 2.5cm짜리 3색 포스트잇을 준비한다.
각각의 3색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우선 파란색 포스트잇은 연구결과나 새롭게 알게 된 이론 혹은 개념이 등장할 때 붙이는 용도이다. 그리고 빨간색 포스트잇은 무엇인가를 깨달았거나, 꼭 붙잡아두고 싶은 문장들이 있을 때 붙이는 용도다. 마지막으로 노란색 포스트잇은 실제 삶에 적용할만한 Insight를 내포하는 부분으로 Action Plan을 수립하기 위한 부분을 표시하기 위한 용도다.
(3) 3단계: 책을 읽어나가면서 각 항목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미리 그어놓은 선에 맞춰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키워드를 간단히 적어놓는다. 앞서 자를 대고 그은 2.5cm의 선의 간격이 포스트잇의 길이와 딱 맞아떨어질 것이다. 선을 미리 그려놓으면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포스트잇을 편하게 붙일 수 있다.
이렇게 초독을 할 때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다 해놓으면 '재독'을 하는 시간이 절반 이상 축소된다. 각각의 포스트잇이 의미하는 부분들과 포스트잇 끝자락에 적어놓은 키워드를 보고 필요한 페이지를 빠르게 펼쳐낼 수 있다. 그리고 해당 페이지를 차분히 스캐닝하면 필요한 부분만 색출하여 빠르게 재독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작업할 때는 귀찮겠지만 꼭 한번 실천해보길 바란다. 재독이 수월해질 것이다. '재독'이 수월해지면 반복학습을 빠르게 많이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비슷한 류의 다른 책들을 읽어나갈 때도 복습을 하며 여러 권의 책을 함께 통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개념들이 연결되고 배경지식이 쌓여나가면 그 분야에 관한 지식이 쌓이게 된다. 그러면 '망각하는 뇌'를 '기억하는 뇌'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읽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덤이다.
망각을 이겨내는 재독의 대원칙! 어렵게 읽으면 절대 쉽게 망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