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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ovator Feb 11. 2020

<폭군>을 통해 조망한 <남산의 부장들>

서평_<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

<남산의 부장들>, 그리고 <폭군>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피살한 ‘10. 26 사태’의 전말을 모티브로 한 팩션(Fact + Fiction) 장르의 영화이다. 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독재와 독재를 옹호한 주요 인사들의 갈등구조, 그리고 그 속에서 주인공들의 내면 변화를 연기하는 명품 배우들의 소름 돋는 연기가 이 영화의 백미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읽은 스티븐 그랜블릿의 명저 <폭군(tyrant): 셰익스피어에게 배우는 권력의 원리>에는 영화에서 미처 캐치하지 못한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리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책 <폭군(tyrant): 셰익스피어에게 배우는 권력의 원리>에서 정의하는 ‘폭군’의 의미부터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책의 원제인 ‘tyrant’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영어단어는 전제군주, 폭군, 압제자 등으로 해석된다. 코빌드(cobuild) 영영사전에는 “자신이 권력을 행사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잔인하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사람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따라서 왕이 아니어도, 잔인하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독재자가 된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255 -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는 이미 <헨리 6세> 3부작에서 다루어진 바 있는 야심만만한 독재자들의 성격적 특징을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 그 특징은 무한 이기주의, 멋대로 법률 위반하기, 남에게 고통을 가하며 즐거워하기, 남을 제압하려는 충동적 욕망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다. 그는 자신의 자질을 괴이할 정도로 과대평가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좋아하고, 부하들이 황급히 그 명령을 이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거워한다. 그는 남에게서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것을 고마워하지 않는다. 남들의 감정 따위는 그에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타고난 고상함도 없고 인간적 감정을 남들과 공유하지도 못하고, 예의가 바르지도 않다. 그는 법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법을 싫어하고 위반하기를 즐기기 조차 한다. 그가 하는 일에 법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그가 경멸하는 공익이라는 개념을 대변하기에 증오한다. 그는 세상을 승자와 패자로 구분하여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될 때만 그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패자에 대해서는 오로지 경멸감만 표시한다. 공익은 패자들이나 지껄여대는 한심한 얘기이다. 그가 즐겨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수를 쓰든지 상대방을 제압하고 이기는 것이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78 -


독재자의 곁에는 늘 충성심 넘치는 심복이 있었다


    저자는 ‘전제군주’, ‘독재자’, ‘폭군’이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군림을 도와주는 외부적 요소들에 주목한다. 독재자의 곁에는 그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다하는 충실한 심복이 항상 있다. 어떤 메커니즘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는 암시한다. 그의 희곡들은 한 국가가 그 이상과 심지어 자기 이익마저도 내버리게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탐구한다. 그는 자신에게 묻는다. 왜 어떤 사람들은 분명 통치할 자격이 없는 지도자, 혹은 위험할 정도로 충동적이거나 사악할 정도로 음모를 꾸미거나 진실 따위에는 아예 무관심한 자에게 마음이 끌리는가? 왜 어떤 상황에서는 거짓, 무례, 잔인의 증거가 치명적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열렬한 추종자들을 만들어내는 힘이 되는가? 왜 평소에는 자부심 강하고 은인자중 하는 사람들이 독재자의 뻔뻔스러운 태도,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하든 아무 문제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나오는 독재자의 뻔뻔한 오만함, 그리고 그 독재자의 엄청난 무례함에 그대로 굴복해버리고 마는가? (중략)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이렇게 묻는다. 너무 늦기 전에 국정이 불법적이고 독단적인 통치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아내고, 폭정이 반드시 가져오는 시민 사회의 참사를 멈추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10 -


이미지 출처: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4602


   이에 대해 저자 스티븐 그랜블랫은 독재의 탄생을 돕는 ‘독재를 돕는 사람들의 6가지 유형’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구분하여 설명한다.


독재자에게 정말로 속아버린 사람

괴롭힘과 폭력의 위협 앞에서 겁을 먹었거나 무기력해진 사람

독재자가 겉보기와 마찬가지로 내면도 철저하게 사악한 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지 못한 사람

독재자가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잊지 않지만 그래도 모든 일이 정상적인 방식으로 굴러갈 것이라고 보는 사람

독재자의 집권으로 그들 자신이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외 명령을 수행하는 잡다한 사람


옮긴이 이종인 번역가는 본 책의 ‘엮은이의 말’에서 이를 3가지로 초점을 맞추어, 보다 이해하기 쉽게 정리했다.


독재자의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

독재자가 도덕을 위반해도 국가는 그런대로 굴러가리라고 보는 사람들

독재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사람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시각은 탁월한 인사이트를 지닌다. 실제로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독재자들의 곁에는 위에서 언급한 충실하고 열렬한 추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자 곁에는 내가 있잖아"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미국에서의 청문회를 통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재체제를 신고한 전 중앙정보국장 박용각(곽도원)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한민국 대통령(이성민)은 중앙정보국장 김규평(이병헌) 에게 그를 살해하라는 명을 다음과 같은 대사로 의미심장하게 암시한다.


김규평(이병헌): "각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대통령(이성민): "임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자 곁에는 내가 있잖아."


 <폭군(tyrant): 셰익스피어에게 배우는 권력의 원리>에서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다룬 것과 같이 독재자가 정적, 혹은 체제 유지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해치우는 아주 간편한 방식을 '리처드 2세'에 나오는 대목을 끌어들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미심장한 암시만 하면 충분하다. 그 암시는 아주 조심스럽게 반복되고, 또 거기에다 그 암시의 의미를 재빨리 파악할 법한 사람을 ‘찬찬히’ 쳐다보는 눈빛이 가세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새로운 체재에서는 새 통치자의 은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30 -


결국, 다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들이 맹목적으로 독재자에게 충성하도록 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독재자들의 체제 유지를 돕는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이면서도 무조건적인 충성심이 바로 '두려움'에 기인한다고 암시한다.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지 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내팽개쳐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들은 목숨 걸고 충성경쟁을 한다. 그렇다면, 독재자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충성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바로 무조건적이고도, 즉각적인 동의이다. 소위 말해 "까라면 까"는 것이 충성심에 대한 증명이다. 그런 면에서 독재의 충신들은 생각이나 고민을 해서는 안된다. 판단은 독재자가 하고 심복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수행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이 달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독재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독자적인 의견이다. 그런 의견을 독재자 자신이 먼저 요구했어도 그런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충성심인데, 이때의 충성심은 정직, 명예, 책임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독재자가 원하는 충성심은 그의 의견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동의이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의 명령을 이행하려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독재적이고, 편집증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통치자가 고위 관리에게 충성심을 요구하면 나라는 위태로워진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169 -


   반면, 이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고, 하늘을 찌르는 권세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 보이던 독재자들은 대체 왜 사소한 트집만 잡히면 수족 같은 추종자들을 차갑게 내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독재자의 행동 역시, 기저에 '언제 나락으로 밀려날지 모르는 불안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권력의 소유는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입지를 강화하려면 뭔가 추가조치를 해야 했고, 범죄 행위를 통하여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추가로 범죄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독재자는 최측근의 충성심에 강박적일 정도로 몰두하지만, 과연 그런 충성심을 확보했는지 절대 자신하지 못한다. 그에게 봉사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리처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악인들뿐이다. 아무튼 그는 정직한 충성심 혹은 냉정하고 독립적인 판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에 아첨, 확증, 복종을 원했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123 -


흔들린 충성, 그날의 총성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재 대통령(이성민)은 결국 권력을 반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의 심복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의 심기에 거슬리면 하나 둘 죽여나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결국 독재자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는 계기가 된다. 그가 내치려 했던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 역시 언제 피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독재자의 가슴에 총탄을 박는다.



그러나 독재자는 그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결국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를 미워하게 되니까 말이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187 -
그들이 아무리 잔인하고 난폭하다고 해도 모든 반대세력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그들의 고립, 의심, 분노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오만하고 과도한 자신감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마침내 그들의 몰락을 촉진한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192 -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제 역사에서 박정희를 피격한 김재규(극중 이병헌이 연기한 김규평)를 미화한 것 아니냐며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사실 그 역시 독재자가 횡포를 부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으며, 그 안에서 본인의 역할을 철저히 수행한 사람이기에 질타를 피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독재자에게 왕관을 씌우기 위해 수없이 많이 당겼을 묵직한 쇳덩어리에는 아무리 닦아내도 핏자국이 선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심지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책임은 모면할 수 없다. (중략) “나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지지 않겠어. 그러면 나는 그 의미로부터 책임이 없게 될 테니까.” 평소 점잖던 사람들이 “그 의미로부터 책임이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저지르는 이런 다양한 행동이 결국에는 독재자의 횡포를 도와주는 것이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107 -


시민이 곧 도시이고, 국민이 곧 국가이다


   비록 실제 근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첫 번째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김재규의 총알이었지만, 두 번째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힘은 민중으로부터 나왔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극에서도 독재체제를 사전에 방지하거나 시정하는 힘이 민중에서 나올 수 있음을,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보여주었다.

“브루투스, 우리가 열등한 지위에 있는 것은 그 잘못이 우리의 운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독재자의 출현이라는 즉각적인 위협에 대하여 뭔가 조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198 -
군중들은 종종 어리석고 배은망덕하며, 민중 선동가에게 쉽게 넘어가고, 그들의 진정한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더디게 이해한다. 비열한 사람들의 잔인한 동기가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보이는 기간, 그것도 긴 기간이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은 결국에는 실패한다고 보았다. 그들 자신의 사악함과 민중들의 인간적 감정에 의해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 민중의 감정을 일시적으로는 억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예 없애지는 못한다. 셰익스피어 생각에 집단적 올바름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기회는 보통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에서 나온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247 -


   결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장 총강의 내용은 대한민국이 단 한 명의 폭군에 의해 휘둘릴 수 없음을 법적으로 지정한 내용이다. 우리는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폭군>을 읽고,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시민을 빼면 도시가 대체 뭐라는 말입니까?” 그러자 그의 추종자들은 그 말을 그들의 구호로 삼아 외쳐댄다. “시민이 곧 도시이다.” “시민이 곧 도시이다.”   

- <폭군>_스티븐 그린블랫_being_p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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