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명! 회의실을 예약해라
본사로 발령받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조금씩 사수와 합을 맞춰 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팀장님께서 지나가시는 말로 내 사수에게 "우리 오후 회의 때문에, 회의실 예약 좀 해야 할 것 같은데?"라고 말씀하셨다. 내 사수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1분 정도 지났을 때 내게 말했다.
"팀장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걸 네가 들었으면 알아서 회의실 잡고 예약해야 하는 거야."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니.. 본인도 손발 있는데 왜 내가 회의실 예약을 해야 하는 거지? ( 그땐 그저 철없는 MZ에 불과했다.. ) 그래서 어찌어찌 회의실 예약하는 시스템에 들어가서 어찌어찌 오후 시간에 비어있는 회의실을 잡았다. "사수님. 회의실 예약 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마자 바로 혼났다.
"너는 이 회의에 몇 명이 참석하는지 아니? 그리고 회의 주제는 무엇인지, 누가 회의에 참석하는지, 어떤 회의인지 생각하고 예약을 한 거니?"
갑자기 속사포처럼 내게 쏘아대는데 당황스러우면서도 억울했다. 아니 그냥 회의실 예약 하라며...
신입사원 티를 벗지 못해 생각도 많이 짧은 시기였고, 아직 회사에서 사수/부사수와의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던 때의 철없는 에피소드다. 지금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회의실 예약부터 그에 필요한 준비까지 모두 끝마친다.
우선, 위의 에피소드에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자
사수와 부사수의 관계는 군대로 따지면 저격수와 그가 좋은 저격을 할 수 있게 옆에서 돕는 관측수와 같다.
관측수는 저격수가 목표를 저격할 때 온도, 습도, 바람의 방향 등 저격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확인하고 목표를 확실히 저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즉, 저격수는 메인 업무인 저격 외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 없이, 저격에만 신경 쓰면 된다. 이를 사수/부사수 관계에 대입하면 사수가 해당 업무의 메인 핸들러고, 부사수는 한조가 되어 메인 핸들러가 업무를 잘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인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며, 이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즉, "회의실을 예약해라"라는 짧은 문장에는 "내가 회의를 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 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이 업무를 왜 하는 거지?'라는 WHY?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것은 큰 프로젝트부터 작은 회의실 예약까지 모든 업무에 기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일을 대하는 사고방식이다. 위의 에피소드처럼 WHY? 질문을 하지 않으면 회의실을 예약하라는 말에 예전의 나처럼 그냥 아무 데나 빈 회의실을 예약하는 참사가 빚어진다. 하지만 WHY?라는 질문을 던진 후부터는 달라진다.
[ WHY? 질문의 선순환 프로세스 ]
나 : 왜 회의실을 예약하는 거지?
> 목적은? 팀장님의 월 전략 회의
> 그렇다면 인원은? 팀 전체가 아닌 선임 6명만 참석
> 회의 시간은? 1시~2시까지 라면 앞뒤 30분 정도 여유 있게 회의실 예약
> 선임 6명과 회의할 주제 및 관련 유인물이 있나? 미리 자료를 인쇄하여 세팅해 둔다.
> 혹시 미리 음료를 세팅해두어야 하는 걸까? 사수에게 물어본다.
> 기타 세팅해두어야 할 것이 있을까? 사수에게 물어본다.
사수 : 오? 이 녀석 신입이지만 업무를 하는 센스가 있는데?
"회의실을 예약해 줘"라는 짧은 문장에는 사수/부사수 관계에 대한 개념 및 업무를 대하는 기본적인 사고방식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회의실 예약은 그 자체로는 별것 아닐 수 있으나, 기본 중의 기본이며 이 업무 하나로 그 사람의 업무 센스를 알 수 있다. 또한, 사소한 업무이나 신입답지 않은 세심함을 어필할 수 있으며, 업무를 지시한 사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위의 글을 읽고도 아직도 그깟 회의실 예약이 뭐길래 대단한 것인 양 이렇게까지 설명하는 거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럼 단순히 생각해 보자. 본인이 아랫사람에게 회의실 예약해 달라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이후 모든 게 알아서 세팅되어 있다면? 안 그래도 팀장이나 임원이 주는 업무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은데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결론은 "회의실 예약해 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아래의 것들을 물어보자
- 어떤 회의인가요? ( 회의의 목적 파악 )
- 몇 명이 참석하시고, 누가 참석하시나요? ( 경우에 따라 임원 혹은 팀장일 수 있음 )
-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회의가 진행되나요? ( 여유 있게 앞뒤로 1시간 ~ 30분 정도 회의실 예약 )
- 회의 진행 시 필요한 유인물이 있을까요? 인원수에 맞게 미리 인쇄해 두겠습니다.
- 필요시 음료를 인원수대로 세팅해 둘까요? ( 외부 업체 미팅의 경우 음료 세팅은 거의 기본 )
- 혹시 더 세팅해둬야 하는 것들이 있을까요? ( 계절에 따라 에어컨/히터를 미리 세팅해 회의실 내 온도를 맞춰둔다면 센스 만점 )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생각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사수 혹은 주변인에게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 그로 인해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보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