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사이를 채우는 흔적, 그 가슴 저림
모든 이야기는 비밀과 신비로움을 전제한다(p.86, 서사의 위기 by 한병철, 2023).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한 후기를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 혼자서만 야금야금 뜯어먹고 싶다. 내게 온 기억과 그 사이를 메우는 흔적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가슴 저린 이야기 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사람을 선택했다.
인간은 오직 사색하는 그 상태에서만, 자신을 벗어나 다른 사물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수 있으며(p.35, 피로사회 by 한병철, 2012) 우리는 지금 자기 착취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에, 내 인생이 통째로 쓰레기장에 처박히는 것 같은 충격을 맛본 2022년이었다.
그렇다고 쓰레기장에 처박진 않았다. 내 인생이니까. 내 이름 희수(希繡), '네가 바라는 것에 수를 놓고 살라'고 외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내일 죽어도 좋을 만큼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다. 지금의 나를 사랑한다.
한병철의 피로사회(2012)와 투명사회(2014)로 현상을 이해하며 조금씩 삶의 눈을 뜨고 있었다. 한병철의 이 책들이 한국에 소개된 2012년과 2014년은 그야말로 나 자신에 대한 착취가 극대화되었던 때였다. 그 이전 10년과 그때부터 10년이 나의 현재를 만들었으며, 과거 자신에 대한 착취가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어본다.
10월의 다짐을 잘 실천하고자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작년부터 이어온 한병철을 잘 정리하고 싶다. 대학 1학년때 빠져있던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같이 이어지는 철학이라 흥미롭다. 메모해 둔 '긍정적 대답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착취자'라는 그의 말은 한병철과 맞닿아 있다.
한병철은 최근 읽은 작가의 두 권의 책과도 연결되어 흥미롭다. 소설과 언어적 사유가 서사적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 같아 더 분석적으로 들여다볼 생각이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면서 정신적인 구원과 부활을 제시하는 유리알 유희(헤르만헤세, 1943)로 내가 따라가야 할 큰 지도를 남은 2023년에 완성하고 싶다.
차가운 이성의 사이사이엔 눈물도 사랑도 많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23년은 내게 특별하고 새로운 해다. 책으로부터 구원을 얻었고 사람에 눈멀었다. 읽으며 자라고 있으며 쓰며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기 위해서다.
눈멂의 중의성을 기억한다. 모든 것을 보여주고 봐야만 안심하는 천박한 시대에 한병철의 눈멂이 절절하며 나의 눈멂 또한 존중한다. 어쩌면 맹목적인 나의 시선과 방향이,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가야 한다고 다짐한다. 결국 사람인 것이다. 기억도 이야기도 가슴 저림도.
커피를 끊기로 한 한 달 동안 내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으로 나를 최대한 착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