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빛에 가장 가까운
[한병철 단상] 유혹과 욕망과 동경의 푸른색과 대립되는 노랑
10월 한 달간 커피를 단절시키고 있다. 애달아하는 나의 결핍의 증상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얼그레이를 마시고 카모마일을 마시고 오설록 차를 종류별로 마신다. 노랑에 집착하며 커피에 대한 갈망을 다스리는 중이다. 나는 노랑색을 좋아한다. 진노랑, 시간을 채우는 진지한 색깔이다.
노랑은 '빛에 가장 가까운 색깔'이며 그는 밤의 인간이어서 날카로운 빛을 품은, 너무 밝고 스스럼없는 노랑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겨울 정원은 노랑이다. 노랑은 겨울을 밝히는 빛이며 희망의 색깔이기도 하다(땅의 예찬 p.39, 한병철).
한병철은 모순의 색인 파란색을 좋아한다. '가장 순수한 푸른색은 자극하는 무(無), ' 먼 곳의 색깔, 동경과 욕망과 유혹의 색깔이라 한다(땅의 예찬 p.39, 한병철). 자극하는 무(無)라니 내 시월의 커피 아닌가. 이 없음의 그리움을 기꺼이 즐기는 이 시월이 대견하고 좋다. 한 달쯤 커피를 멀어지게 두고 바라보기만 한다.
겨울 끄트머리에 태어난 나는 노랑을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겨울은 많은 것들이 아래로 숨어버리고 황량함이 외투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랑으로 세상을 만들어 그 황량함에 빛을 비추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노랑을 입고 노랑을 걷고 노랑을 마시며 노랑 웃음을 연습하며 잘 견디고 있다. 나의 희로애락을 감싸는 색이다.
스스로 밝은 노랑도 먼 곳의 색깔을 동경한다. 가득 찬 빛조차도 은근하게 유혹하는 파랑에 욕망을 품으며 다시 다른 노랑으로 새로 태어난다. 색깔은 경계가 없지만 존재하는 방식은 제 각각의 색깔이다. 나는 노랑으로 존재하지만 파랑을 동경하는 것이다.
파랑이면서도 노랑으로 겨울 정원을 채우는 한병철의 세상은 호기심 투성이다.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가며 그를 읽고 싶은데 그는 내가 거의 안 듣는 슈베르트를 듣고 나는 쇼팽을 듣는다. 어쩌면 쇼팽 녹턴의 분위기가 밤과 공유하는 겨울의 느낌을 표현한다고 억지 억지 꿰어 맞춰본다. 그를 읽을수록 그의 세상이 여리고 감미롭다는 것을 알아챈다. 아름다운 그의 말과 그의 시간과 그의 정원을 매일 기웃거린다.
한병철의 '땅의 예찬'은 무척 아름다운 책이다. 소주제 앞쪽마다 그가 사계절 정원에 키웠을 식물과 꽃들이 학명과 함께 도감처럼 그려져 있다. 매혹적인 검정 바탕에 세밀한 펜드로잉처럼 보여 나의 꿈틀거리는 욕망을 자극한다. 내가 곧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노랑은 파랑을 향해 빛을 보낸다.
어떤 틈이라도 빛으로 채우고 싶다. 어떤 어둠이라도 빛으로 밝히고 싶다. 어떤 유혹과 욕망일지라도 빛으로 감싸 안고 싶다. 그것이 노랑의 숙명이다.
'자극하는 무(無)' 이보다 더 설레게 하는 말이 있던가. 노랑인 나는 파랑을 동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