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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Nov 03. 2023

[책] 헤어지기 좋은 시간

김재진 시집(2023), 눈(snow)인 줄 알았는데 별(star)이었네

김재진의 파랑은 주변으로 비껴 난 색깔이다. 중심에서 빠져나가버린 채도가 낮은 안전함으로 피해버린 색깔. 빛나는 독을 품은 찬란한 파랑을 피해 그는 세상의 이방인으로 편하게 부유한다. 아프게 떠다닌다.


설산이니 눈(snow)이려니 그 눈이 가득이니 겨울이려니 하는 상상을 단번에 깨는 겉표지와 가장자리 안표지에서 가슴이 저려 눈물을 쏟았다. 눈(eyes)을 막고 마음을 단절시키는 여름의 눈(snow)은 환하게 잘살고 있는 줄만 알고 있던 나의 시간을 시궁창으로 구겨버렸다. 훌쩍훌쩍 우는 거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여름 눈 속에 걸려있는 저 초승달은 대체... 왜 거기에. 눈보라가 삼키는 사람, 눈보라가 가져가는 길, 지워지는 세상, 그 시인이 그렇게 살고 있구나 힘들구나 한다. 나도 지금 힘든 거구나. 계속 가보기로 한다.


상처와 눈물을 평화와 미소로 기원하는 첫 메시지와는 달리 정체성 없는 어정쩡한 파랑색 속지로 갈린 세 개 세상의 시(詩)들은 그리 희망을 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김재진이 바라보는 세상의 색깔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지도 않는 그 시들에서 이 아침을 허우적거리는지 속수무책이다. 


그의 시는 현란하지 않다. 그에게서 나오는 무채색 생각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더 가슴을 저미는지도 모르겠다. 짧게 소개된 그의 이방인 같은 삶, 그의 새로운 시집의 발문으로 이방인의 역사를 더 읽는다. 발문을 여러 번 읽으며 나는 왜 데미안의 서문을 쓴 토마스 만을 떠올렸을까. 


김재진과 그의 시집 발문을 쓴 윤일현을 헤르만헤세와 토마스만에 동일시하는 나를 본다. 그들이 공유하는 역사의 깊이와 색깔이 고난의 극복과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극복하고 있는 것은 맞는 것일까. 헤르만헤세와 토마스만은 오래전 죽었으나 살아있으며, 김재진과 윤일현은 지금 살아있으나 어쩌면 세상의 불합리에 죽어가고 있는 중일 거다. 

차분히 읽다 문득 정신이 깨는 순간이 있다. 외래어로 쓰이는 꽤 많은 영어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세상과 동떨어진 김재진을 본다. 눈물 속의 미소다. 내게는 편안한 미소지만 김재진에게는 세상과의 괴리가 아닐까.


테라스, 이모티, 스탭이 그랬고 스카치테이프, 터보엔진, 워키토키, 베이스캠프가 깊고 짠한 의미로 내게 들어왔다. 모두 붙이고, 다가가고, 연결하고, 쉬고 싶은 이상향이 아닌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갔으면서도 결국 그 세상을 향해 손을 뻗으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희망을 흘긋거리는 그는 바로 나의 세상이다.


김재진의 시들은 찢어져 상처 난 가슴에 그저 내려와 앉는다.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거나 큰 위로를 건네는 것도 아니다. 훌쩍거리다 보면 조금 더 세상 한켠에 편하게 서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당신은 나의 습관이다(투항, p.19), 여려서 자주 아픈 마음(가을이 내게 쓴 몇 줄의 편지, p.43), 목줄도 없이 묶여 사는 인간을(소크라테스 견, p.121), 먹고살기 위해 비굴해지는 / 슬프지 않은 슬픔(아가미, p.138-9), 우리는 세상의 약한 것들과 연결된다(연결, p.149), 틈새마다 소스라치며 인정해야 하는 삶에 탄식한다.


이 몹쓸 가을이 내게 시를 읽게 한다. 시를 듣게 한다. 눈물을 쏟게 한다. 그러면서 치유의 힘을 얻는다.


그래서 시(詩)가 있나 보다. 

김재진이 있나 보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눈(snow)인 줄 알았는데 

항상 거기서 빛날 별(star)이었네.


그의 그림을 더 보고 싶다. 

그의 시가 있는 그림을.



그림 출처 - 안표지 '여름의 눈보라' by 김재진 (일부) oil on canvas,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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