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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Nov 07. 2023

간격의 환상

인정해야만 하는 차이를 채우는 것

모든 것에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은 환상이 채운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두 개 낙엽이 앞 유리에 붙어 아우성치는 방식이다. 소리를 듣는다. '나 잡아봐라' '나를 알아내 봐라' '나의 실체를 너를 통해 알고 싶어' 


그런 건 없다. 환상의 소용돌이가 어지럽다.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거리,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 나는 저 거리를, 치명상을 피하게 하는 안전거리라 부른다. 그 안전거리 안에는 밖으로 차마 낼 수 없는 욕망이 자리 잡는다. 보이는 안전거리와 보이지 않는 욕망이 두 겹으로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다.


환상은 글쟁이의 현실이며 거부하는 자의 허파를 채우는 공기 같은 거다. 불현듯 인정하려니 자아가 흔들린다. 진실한 자기를 덮고 그럴듯한 표정으로 산다. 빨강이면서 청록이라 한다. 파랑이면서 주황이라 한다. 초록이면서 자주라고 한다. 사실은 이 색깔들이 어지럽게 섞인 환상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나의 환상은 매일 거대하게 불어난다.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차에 오를 때마다 커다란 환상들을 하나씩 깨어내는 삶의 연속이다. 힘들고 구차하게 나를 인정해야만 하는 시간들의 너절한 조합, 내 삶이다. 


타인의 잘못된 라벨링 속에 고뇌하며 비명 지르는 순간들이 쌓인다. '차분하고 평온하게 사는' 나로 보이는 세상의 거울을 깨야 한다는 조급함. 눈썹게 콧볼에 커다란 피어싱이라도 해야, 목덜미에 번쩍이는 도끼 문신이라도 해야 저 적응할 수 없는 내 상표를 떼어낼 수 있을까. 


아마도.


나도 당신을 내 환상 속에 요리하고 있을 것이다. 자아가 덜컹덜컹 위태롭게 보이는 친구도, 언제나 든든하게 안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내가 몰두할 만큼 투명하게 아름다운 존재도, 내가 씌워둔 환상 속에 집착하며 스토킹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큼 밖으로 나가 이것을 깰 것인지, 환상의 혼란을 계속 즐기며 살 것인지를 정해야 하는 건 고통이다.


문득! 이 그리움은 어떤 그리움인지. 시(詩)의 욕망을 알아챈다. 



사진 - 내 차 앞유리 비에 젖은 나뭇잎 두 장 2023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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