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흰색 캐리어를 은빛 조개처럼 벌려 놓고 관광객이 될 것인지 여행자가 될 것인지를 저울질한다.
지금까지 혼자 여행을 하면서 관광객의 마음가짐인 적은 없었다. 떠나오면 그간 있었던 사소한 행복들 조차 모두 잊고 그냥 그곳에 오롯이 머물고자 했다. 애써 눈감아 외로움이 옳은 줄 알고 그저 걷던 여행이 허무로 향한 길일수도 있다는 건 겪을 아픔을 다 지나오고 나서야 깨닫는다.
여행자로 떠났다가 되돌아온 곳에는 관광객의 찬란한 전리품도 없고 여행자의 깊은 사색도 없다. '허무와 망각에 관한 외로운 사색*'은 여행자의 목적이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 앞에서 무엇이 두려웠던가.
'손톱깎이는 여기에 있어. 그리고 자주 사용하던 그릇은 여기야.'
여행자로 떠날 때마다 나의 오랜 습관은 주위를 외롭게 정리하곤 했었다. 오래전부터 다시 올 수 있을까 떠나 닿았던 그곳은 계속 나를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았다. 무언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영화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 예고편의 마지막쯤, 중년 신사의 말이 묵직하다.
'우린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후를 얼마나 기억하게 될까? ...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 삶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 사랑받았던 기억들, 사랑했던 시간들, 그 모든 절절한 깨달음을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곧 나는 저 커다란 흰색 캐리어를 다시 열어두고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이번에는 여행자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