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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May 24. 2023

불을 끄고, 오늘은 시계 방향으로

더듬더듬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큰방 욕실에 들어가 불을 끈다. 눈을 힘주어 크게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서 시작이다. 


내가 이런 놀이를 하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문의 오른쪽 옆으로 삼십 센티쯤 훑어가면 휴지 걸이가 있다. 두툼한 휴지 위로 철제 덮개가 차갑다. 아직 교체할 때는 안되었구나. 벽타일 줄눈을 오른손 검지로 따라 조금 더 가면 욕실 귀퉁이를 만난다. 그대로 꺾어 갑자기 솟아 오른 수납장의 거울 문을 더듬어 본다. 거울이 필요 없는 날이 오려나. 슬픈 공포가 눈밑까지 찬다. 


스르르 수납장을 열면 맨 아래칸에 두루마리 휴지가 다섯 개 있고, 직사각으로 접어 세워둔 수건이 친구인 듯 가족인 듯 서로 기대어 서 있다. 위 칸으로 올라가면 남편의 면도기 리필 날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때도 면도날을 손잡이에 꼭 맞춰 끼워줄 수 있으려나. 하늘색 가는 띠를 위쪽으로 꽂아야 면도하는 방향으로 잘 꽂은 거다. 아! 가는 띠를 확인하려다 손을 베는 상상에 엄지가 아린 거 같다. 


싱크를 따라 네모난 수도꼭지를 다독여도 보고, 한쪽으로 밀어둔 샤워 커튼을 잡아당겨 끝까지 닫아도 본다. 커튼 아래쪽에 회색 곰팡이가 오르기 시작하면 분홍 대야에 락스를 희석해서 소독해야 하는데... 가능할까.


어둠을 멈출 수 있다면 좋겠다.




밤 운전, 터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공포다. 가끔 눈 양 옆으로 가느다란 검정 기둥이 생길 때가 있다. 이십대 중반 쯤부터 그랬다. 영등포에 이름나다는 안과에서 검사하고 치료받은 후 그냥 눈이 약한가 보다 하고 살았다. 사람이 다 약한 구석은 하나둘씩 있으니까.  


요즘엔 책을 읽을 때마다 금세 눈이 어지럽고 뿌옇다 했더니 가족들이 난리다. 시간이 없는데. 해야 할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병원 갈 때가 되면 슬슬 부아가 난다. 그래도 책 읽기가 힘들어지니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일 마치고 바로 안과로 달려갔다.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수정체가 넓게 뿌연 부분이 있다며, 뒤쪽 신경 가닥들의 위치를 눈 모형을 보며 꾹꾹 눌러 가리킨다. 신경이 죽으면서 서서히 시력을 잃을 수 있다며 정밀 검사를 다시 하잔다. 


녹내장 검사는 눈을 빛으로 뒤지고, 빛 반짝이는 만큼 집중해서 버튼을 누르는 검사를 한다. 집중력을 잃으면 다시 해야 한다. 결국 한번 더 했다. 구토 직전에 검사가 끝났다. 휴우. 


결과 사진에 초록이 두껍게 덮여 있으면 신경이 살아 있는 것이고, 빨간색이 올라와 있으면 신경이 많이 죽은 거란다. 아직 보이긴 한다고요. 초록이다. 아래쪽 작은 점도 생겨 정기적으로 관찰하자고 한다. 아직 녹내장도 아니고 황반변성도 아니라고 한다. 아직이라뇨! 


처방은 루테인. 근데 약 말고 녹황색 채소를 많이 먹으란다. 약보다 채소가 훨씬 루테인 흡수율이 좋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분당내곡 간 도로 양편으로 초록색 나무와 풀이 가득이다. 이 숲을 다 뜯어먹으면 눈이 더 괜찮아지려나? 채소도 아닌데 단지 초록이라는 이유로 나무와 풀에 괜한 분풀이를 해본다. 


녹황색 채소, 알았다고요. 


내가 좋아하는 초록, 앞으로는 초록에 힘쓰며 살아야겠다. 

저 찬란한 초록을 한껏 즐기며 살기 위해서, 저 초록 사이로 내리는 태양을 기쁘게 마주 보며 살기 위해서, 더 많이 초록 초록 살기로 한다. 초록을 좋아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녹황색 채소. 


어둠에 익숙해지는 연습도 꾸준히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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