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고 싶은 마음, 잘하고 있어.
키가 엄청 크신 너의 아빠 뒤로 숨어 눈만 빼꼼하게 네가 나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해.
막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영어 단어 몇 개만 더듬거리며 차분히 읽었지. 그러곤 아빠 뒤에 다시 숨어서 아빠랑 나랑 하는 말을 조용히 듣다가 집으로 갔네. 아빠가 전화하셔서는, '우리 아이가 선생님이 좋대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그럴게요.'
몇 개월 뒤 너는 다시 아빠 손을 잡고 나를 만나러 왔어. 배시시 흐릿흐릿 수줍었던 너, 칠판으로 가더니 그림을 그리고는 영어 단어 몇 개 써놓고 아빠 손을 끌고 다시 나갔잖아. 나는 네가 곧 돌아올 거라 생각했네. 집으로 간 아빠가 다시 전화를 하셨지. '우리 아이가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은데 너무 부끄럽대요. 떨린대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그럴게요'
여름방학이 지났던가. 그때도 아빠랑 와서는 아빠 무릎에 앉아 나를 빤히 봤잖아. 내가 이런 거 이런 거 할 거야. 이런 거 배울 거야 소개했었네. 넌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 그런데 그날은 너의 아빠 혼자 집에 가셨지. 조용하고 수줍은 너와의 시작은 그렇게 세 번째 만남부터였어. 신기하고 기쁜 순간이었지.
네가 아빠를 다시 따라 집으로 갔대도 나는 기쁘게 네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을 거야.
'기다릴게요, 그럴게요.'
너는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고 숙제도 잘하고 성실하게 잘 지냈지만 많이 외로웠나 봐. 아니면 내가 너무 외로워 보였을까? 가끔, 수업이 끝나면 조용히 내게 걸어와서 나를 꼭 안아주곤 했잖아. 나도 널 꼭 안으며 등을 다독다독 했었네. 그럴 때 네가 했던 말 기억나. '선생님 냄새가 좋아요.'
안개꽃처럼 코끝을 스치던 너의 향기를 기억해. 너의 수줍은 말들도 따뜻한 시선도 모두 차분히 내 마음에 쌓여 나의 향기로 익어가고 있네.
살아가는 건 스치며 만나는 사람으로 시간의 농도가 더 진해지는 과정일 거야.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거지. 네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처럼 살아가면 돼.
잘하고 있어
나도 멀지 않은 곳에서 네가 외로울 때 달려올 수 있도록 잘 지내고 있을게.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니 마음이 벌써 헛헛해져서 네 이야기를 내 한편에 남긴다.
따뜻함도 수줍음도 나누어 숨 쉬던 공기마저도 기억할게,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