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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un 01. 2024

어느 북토크

목소리를 모아 오다.

한 단락씩 읽어 봅시다.


순간, 긴장의 정적, 그리고 그 긴장을 풀어보려는 부스럭거림이 낮은 불협화음으로 찢어져 허공을 채웠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목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흐르고, 어떤 목소리에는 달그락거리는 심한 떨림이 귀엽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에 가식의 품위를 입힌다. 저자는 그런 목소리에서 사람을, 그리고 그 성격을 읽어내려는 것 같았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한 사람을 향해 모인 사람들이지만, 그들 뒤에 달고 온 숨은 목소리를 작가는 읽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흔들리는 커다란 눈빛을 슬쩍 바라보며 안 읽히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마치 게임하듯이 단락 읽기가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예민함에 자세를 바로 하면서 의외로 마음을 차분해졌다. 어디서나 제대로 읽힌 적 없는 경험들이 '너 대로 가라'며 등을 밀었다. 나는 소리 내 읽는 것을 좋아한다. 


첫 번째 단락은 파나 솔톤의 경쾌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기분이 좋아져서 허리를 더 곧게 펴고 앉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나 자신에게 그 기분 좋음을 전했다. 경쾌한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밝게 한다.


내 차례다. 첫 단어가 끝날 때 내 목소리에 내가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전혀 내보지 않았던 내 목소리 톤에 이미 흠뻑 녹아들어 마치 연기하는 것 같았다. 작가를 포함하여 열두 명쯤 있었다. 모두 낯선 대상들 앞에서 내 목소리가 이렇게 공식화되는구나.


다소 저음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틀리지 않고 읽고 있었다. 어? '학모'를 '학벌'로 읽었다. 흠칫 텍스트와 소리의 불일치를 느끼고는 바로 '학... 모...'로 고치며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작가가 바로 오타 라며 '학벌'이 맞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학모'에도 뭔가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았다. 작가의 오타에서 그의 무의식을 감지하려는 내게서 괜한 쪼잔함이 느껴져 속으로 피식했다.


내 목소리가 그런 저음의 차분함을 감추고 있었다는 게 신기한 시간이었다. 물론, 질의 시간에 원래의 삐뚤함과 당돌스러움이 묻어나는 평범한 목소리로 돌아왔지만 내 무의식의 소리가 그 상황을 접수한 듯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래 기억하고 싶다.

 

전문직인 자신의 직업을 우연인 척 까발리며 분위기를 압도하려는 현학적인 목소리와 질문을 지나, 세상은 정말 모르겠어요 라는 톤의 지긋한 떨림이 있었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불확실성에 계속 고개를 떨구는 목소리와 질문들이 이어졌는데, 계속 혼자 확인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질문하는 그 머뭇거림이 왠지 너무 짠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크게 읽고 나누고 질문하는 것을 어려워하는구나.


나는 철학하는 저자의 북토크에 가서 귀만 크게 열어 사람들의 목소리 색깔을 가득 담아왔다.


책을 사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북토크에 가는 배짱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결국 철학하며 글 쓰는 작가의 눈빛과 쏟아져 나오는 강건한 단어들과 삶의 태도에 매료되어 책을 샀다. 이게 북토크의 힘인가 보다.


그가 쓴 서너 꼭지의 글에 마음이 끌려 무작정 갔던 북토크에서, 작가가 정리한 자료에 핵심이 모두 있었지만 그 작가의 철학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 책을 사는 낯선 나를 보았다.


나는 바람직한 북토크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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