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귀 속이 멍하고 시간이 멈춘 듯 불투명한 막막함에 서있을 때가 있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도대체 마음이 움직이지도 않고 한 발을 내딛는다 해도 너무 익숙해서 금세 지루해질까 봐 진저리를 먼저 치고마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랭보를 읽는다. 그가 17살 때 썼다는 시를 소리 내 읽으며 그의 삶으로 들어간다.
아르투르 랭보(Arthur Rimbaud, 프랑스 시인, 1854-1891)는 내 지루함의 친구다. 옆에 있어서 친구가 아니라 내 지루함을 쫓아내 나를 기어이 살도록 지탱해 주는 그런 친구다. 반항하며 방랑하며 규칙과 질서를 잦은 가출로 피하고 천재적인 머리로 일부러 시험을 망치곤 했다는 랭보는 이상하게도 오래전부터 나를 끓게 만든다.
새벽을 깨우는 Keith Jarrett의 1991년 런던에서의 연주, Over The Rainbow를 듣다가 가사도 없는 피아노에 혼자 중얼중얼 기억을 더듬는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 birds fly. 파랑새가 정말 있는 걸까. 지루한 마음에는 무지개도 없고 파랑새도 없다. 무지개 저 너머에는 키스 자렛(Keith Jarrett)의 피아노 선율만 위안이다.
지루한 Rainbow에서 파괴적인 Rimbaud(랭보)로 튄다. 기껏해야 지루함을 덜어보려 얄팍한 언어유희에 시간을 건다. 랭보로 인해 삶의 격정적 톱니바퀴에 끼어 정상의 삶을 짓이겨버린 폴 베를렌(Paul-Marie Verlaine, 프랑스 시인, 1844-1896)으로 마음이 안타깝다.
베를렌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드뷔시의 달빛으로 이어져 Maria João Pires(마리아 조앙 피레스, 포르투갈, 1944 출생)의 드뷔시 달빛을 듣는다. 그녀의 피아노는 누구보다 더 힘 있고 열정적이다. 특히 쇼팽녹턴을 연주할 때는 눈물이 날 지경이다. 조성진의 드뷔시 달빛은 밝고 행복할 때, 마리아 조앙 피레스는 마음이 멈춘 듯 지루할 때 듣는다.
Rimbaud(랭보)만큼 자극과 자해로 삶을 채운 예술가가 있을까. 결국 다리를 잘라내야 했던 그 말기, 온전하지 못한 몸의 종료, 37세, 그리고 그의 초현실적인 시어들이 남았다.
그나마도 비정상으로 취급받던 여러 취향과 반항으로 19세에 절필하고 결국 '상인'이라는 타이틀로 죽음을 맞았던 그의 인생을, 그의 시를 읽으며 넘겨다 본다. 그의 인생이 비참해서 내가 위안받는 것은 아니다. 내 10대가 그와의 교차점을 지나 그가 느꼈던 정제된 또는 정체된 세상에 대한 지루함을 나 또한 느끼기 때문이다.
고착된 일상의 틀어진 뒷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시대가 딱하고 가엾어서, 끓는 열기를 참지 못해 자신의 인생을 고의로 찢어발기며 하나의 작품으로 남은 랭보를 가득 안으며 내 갈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디딜 연습을 하는 것이다.
Over The Rimbaud, 랭보의 저 높은 곳 그의 뒤에는 분명 진실이 있을 것이다. 꼭 믿어야 하는 그 상상력이 남아 기다릴 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랭보를 가려 조금 아쉬운 영화,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 1995, 아그니에슈카 홀란트 감독)를 한번 더 보고 나면 내 지루함이 다른 색깔로 변화되어 있기를.
랭보의 시 중에서 '겨울을 위한 꿈(rêvé pour l'hiver)'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첫 싯구에 마음을 떨군다.
겨울이 되면, 둘이 함께, 장밋빛 열차에 푸른색 좌석의 쿠션에 파묻혀서 떠나갑시다.
안타까운 건, 한국어로 읽으면서 프랑스어는 그림처럼 바라만 봐야 한다는 거다.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름다운 프랑스어 낭송을 들으며 내게 새겨진 한국어 감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소리를 가만히 따라가며 같이 중얼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