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산책부터 합니다. 분홍색 계곡을 지나 주황색 나무들을 기웃거리다 닿은 집과 잔디들이 파스텔로 아름답습니다. 장편소설이니 깊고 긴 호흡으로 흔들의자에 들어앉았습니다.
아, 그런데 뒷 표지를 먼저 열어보는 게 아니었어요. 애너벨 리에 이끌려, 첼로를 타는 목소리에, 쉰들러리스트의 테마라고 쓰인 그 슬프고 어두운 감성에 책을 펼 생각을 한동안 하지 못했습니다. 감정이 아니라 감성.
똑똑똑! 사람을 두드리는 이야기
낭송에 관한 단순하고 아름다운 장편소설일거라고 표지를 보며 생각했어요. 그런데 철학적인 비유와 관념에 오래 고뇌하기도 하고, 지나 온 시간들, 읽었던 여러 책들, 깊은 곳에 내려 두었던 예민한 기억과 감촉을 되살려 현재에 올려두고 다시 저울질하며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가늠해야 합니다.
때로는 노인에 대한 서사로, 때로는 소년의 고뇌로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야 했습니다. 컴퓨터 공학과의 친구와 소년, 그리고 그 노인이 한 인물로 귀결되는 자서전이 아니었을까 하는 궤변적 사고도 하게 되고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벗어나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며, 이 소년과 노인이 손을 내밀고 귀를 열어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준다(p.238)고 합니다. 말도 건넵니다.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 내 삶을 맡겨도 좋을 일을 하면서도 한 구석을 답답하게 누르는 돌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잘하고 있는 걸까.
소년이 하고 있는 고민은 바로 제가 하고 있는 고민이었어요. 소년에게 향한 노인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제게 왔습니다. 그렇게 말을 붙이며 계속 질문하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든 마음의 묵직함이 있지요.
지금 어떻게 서 있어야 할지, 질문도 제가 하고 대답도 제가 합니다. 질문을 잘하고 싶어 집니다. 냄비에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쉬지 않고 저어주는 일이 질문(p.53)이라는 말에 문득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장편소설인데 철학서라 부르고 싶은 책
참으로 신기한 책입니다. 오래 두고 꼭꼭 씹으면서 모두 소화시켜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그런 책, 오랜만입니다. 첫 정독을 한 후 두 번째 읽으며 전체 시간과 공간을 다시 따라갔습니다.
소년과 노인을 따라가며 심리학적 자기 중심성의 중요함을 깨우치고, 서로 알 수도 없고 알려하지도 않는 시대에 자기를 모두 내주고 투명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세태를 꼬집은 최근 읽은 철학서를 다시 펼치기도 했습니다. 투명하지만 암울한 세상을 반성하며 매무새를 고치며 나아갈 바를 정해 보기로 합니다.
벽보다 약한 상자에 들어앉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은 머릿속이 서늘해질 만큼 충격이었습니다. 매몰된 자신, 벽보다 더 움직여지지 않는 마음, 그건 무기력이라 단언하는 순간을 그대로 견디며 계속 읽어 나가야 한다는 건 큰 용기와 힘이 필요했습니다. 반성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떨림과 설렘에 관한 이야기를 부지런히 제 마음에 담느라 분주했어요. 시종일관 설렘, 영원한 그 처음(p.40)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멋진가요!
인간에게 던져진 표식, 계절, 공자에서 이어진 감수성의 공감, 소통, 경험들의 연결은 치유와 화해, 의미 있는 공존, 이 시대 우리들에게 많이 필요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금이라는 공간과 시간에 단정하게 서서 이야기를 건넵니다.
풍성한 열대 과일 같은 언어유희
미소에서부터 푸합! 파하하! 소리를 참지 못한 웃음까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신나고 즐거웠습니다. 언어유희조차도 마치 언어학의 여러 이론들에 맞춰 만든 것처럼 의미적으로 음성적으로 감동을 주는 표현들이 많아 지적인 충만함을 느끼게 됩니다.
크로아티아 인사말 '드라고 미 예'의 분석에 같이 기뻤고 연필을 깎으면 서서히 드러나는 흑연에 대한 표현에도 한참 흐뭇했습니다. 위로라니요. 아, 그리고 시치미와 사파리도 아름다운 유희였어요.
이 이야기에서 가장 핵심을 뚫는 언어유희는 목차에 소개된 '시시해지지 않기 위하여'의 '시시'입니다. 그 시시 말고 다섯 개의 시(時), 시(始), 시(示), 시(施), 시(是), 노인의 언어유희 중 최고였어요.
2X1X3이 나올 때 크게 웃었습니다.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어요.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소설, 삶
'할 때 힘들면 일, 안 할 때 힘들면 사랑(p.156)'은 저를 위해 주신 것으로 접수하겠습니다. 그 힘든 결핍, 견디기 힘들지요. 부는 바람 하나도 그저 보내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주는 작가의 마음을 읽습니다.
평생 안고 살아갈 것들을 가득히 품고 있는 책, 제게 와주어 고마운 책입니다.
받은 날은 예쁘다 했고, 읽으면서는 명언집에 버금가서 감동하는 순간마다 툴러를 붙였습니다. 명언에 평행으로 한 줄 툴러, 기쁜 감성에 위로 향하는 각도로, 반성과 고민의 순간에는 아래로 향하는 각도로 툴러를 붙였어요.
두 번 읽으며 평행 툴러를 떼고, 각도 있게, 엣지 있게, 저를 지탱해 줄 부분은 그냥 남겨 두었어요.
삶의 진지한 안내서입니다.
낭독을 합니다. 녹음된 제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꾹 세게 쥡니다. 누추합니다. 이 책을 읽고 다 지울 뻔했습니다만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저도 저 다운 저일 테니까요. 단단하게 살아가는 방법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