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수공원 Jul 30. 2024

액면, 있는 그대로

느끼고 존재하는 깊이

보이는 그대로를 액면이라 한다. 영어로는 face value, 한자로도 이마(額)와 얼굴(面)을 의미하니 내가 마주 보는 것, 내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정말 내가 보는 것인가.


듣는 말은 확실한가. 보는 행동은 확실한가. 말없는 행동은 말보다 믿을 만 한가. 행동 없는 말은 또 어떤가.


말에도 행동에도 복잡하고 결이 많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리숙하다고들 한다. 어리숙하다고 단정하는 상대가 정말 어리숙한가.


사람의 액면은 그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액면마저도 속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방어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요새의 화려함을 스스로도 액면이라 믿으며 가장된 기쁨으로 사는 경우도 많다.


자신에게 마저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진짜 모습, 실체를 알지만 폭로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지만 소통하고 싶지 않다. 소통은 예기치 않은 누수로 이어져 견딜 수 없는 자신을 소멸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신 이외의 것들에 대한 가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구 파악하며 산다. 그게 자신의 깊이이다. 


마구 파악했으면 구만큼의 구렁텅이를 헤매는 거다. 이해했다 느낄 땐 이만큼의 깊이로, 오해가 있었다면 오만큼의 오류 가능성을 안고 사는 것이다. 오류는 다시 오만큼의 존재를 부정한다. 


당신에게 비친 나의 액면은 무엇인가. 타인의 입으로 내가 재단될 때마다 낡은 재봉틀에 끼어 촘촘하게 박음질되는 느낌이다. 이런 아픈 압박을 느끼게 되니 그제야 방향을 바꾸어 생각하게 된다.


내 두 눈에 보이는 대로 나 또한 들리는 말을, 보이는 이마와 얼굴을, 흔들리는 눈빛을, 내 어깨를 타고 흐르며 다독이는 손길을, 길을 걷다 돌을 차는 발길질을 내 마음대로 재단하며 살아왔을 터였다. 재봉질로 두두두두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고정하며 살았을 거다. 


저 말은 너무 부정적이야. 저 손짓은 참 다정하구나.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혹 천사 아닐까. 현기증 나는 나를 잡아 주다니 참 친절하구나. 내 눈에 온기를 넣어 보이게 되기를 갈망하는 저 말과 저 손길과 저 품을 나는 액면 그대로 받아 들고 파묻혀 산다. 


어쩌면 비겁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편하니까. 그냥 믿으니까. 내 눈의 맹점이 활성화되어 보이지 않는 가치를 놓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원시적으로 산다.


어리숙한 것이다, 누군가 뒤통수를 때리면 그때 아픈 만큼 더 이해하게 되겠지. 액면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렇게 느끼고 산다. 


나를 향한 삽의 날이 더 깊게 들어오면 그건 그때 피하면 된다. 평생 어리숙하다. 괜찮다.

매거진의 이전글 뜨거운 무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