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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Oct 30. 2023

왜 이렇게 한국말을 못 하세요?

아이가 내 실체를 세차게 흔들었다

키득거리며 농담으로 한 아이의 말에 내 온몸의 세포가 쪼그라들었다.


언어가 좋다. 영어가 좋다.


말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영어와 한국어를 매일 말하며 산다. 그렇지만 영어 선생으로 하는 영어는 그 전형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에 평상시의 영어 대화나, 다른 사람의 말을 최대한 비슷한 의미로 전달해야 하는 통역체의 말과는 많이 다르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성인을 가르칠 때 또한 사용 언어와 구조가 다르다.


언어는 신비롭다. 지루하지 않다. 두 개 이상의 언어를 하면 인지적인 발달도 더 많이 이루어진다. 삶을 더 원하는 것으로 채우며 만족도도 높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영어라는 언어에 빠진 사람, 나는 영어로 뭔가 하는 일이라며 일단 오케이 하고 보는 이상한 습성으로 인생 중 어떤 날을 암흑의 세계로 만들기도 한다.


20여 년 전 유네스코에서 순차통역을 한 적이 있었다. 각 초중고에 초청된 외국인을 따라 해당 외국인의 문화를 선생님들에게 또는 학생들에게 통역하는 일이 가장 많았고, 대학 축제 때 외국에서 온 공연단을 통역하는 일 등 다양하고 재미있었던 통역들이었다.


경솔함과 암흑세계는 친구다.


축제 시즌, 갑자기 급 호출에 아무 준비도 없이 호주 원주민 악기 연주팀을 무대 위에서 통역하게 되었다. 왜 내가 오케이 했는지 지금도 이불킥이다. 무대 오르기 5분 전에 악기 이름이 '디저리두'라는 걸 알고 연주팀과 같이 온 외국인에게 정보를 얻었다. 얻었다기보다는 뜯어냈다는 게 맞다.


연주자들의 공연 후 악기를 소개하는 통역 후 무대 아래쪽에서 질문이 들어왔다. 그런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건 어디 영어지?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영어로 질문을 했는데 연주자들도 말을 못 알아듣고 서로 얼굴만 멀뚱 멀뚱이니 어떻게든 영어로 해결을 했어야 했는데 당황해서 무대에서 얼어버렸다. 그 십여 초간 커다란 무대 위 공포가 트라우마로 남았다.


다시는 당일이나 촉박한 시간을 두고 통역을 하지 않아야지. 그리고 난 숫자 바보니까 숫자를 말해야 하는 통역을 안 해야겠다. 굳게 다짐했었다. 그때 이후 전통결혼식 순차 통역이나 간단한 개인 상황 인터뷰 등 가벼운 문화행사나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외국인을 위한 개별 수행 통역을 했었다.


최근 몇 년간은 통역보다 번역을 하면서, 이제는 차분히 앉아 충분히 생각하면서 찾아가면서 가장 적절한 의미로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에 만족하며 살았다. 멋진 글을 발견하면 흥분해서 영어로 번역하는 일은 내가 사랑하는 시간 작업 중 하나다. 그럼에도 항상 번역은 반역이다.


예산 심의 순차 통역인 것을 이틀 전에 알다.


그러면 번역만 할 일이지 또 겁 없이 통역 의뢰에 오케이 하는 일이 벌어졌다. 불과 일주일 전에 통역 주제도 보지 않고 받고는 대강 통역 분위기 상황만 파악하고 있다가, 이틀 전에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던 나는 경악했다. 표로 전해진 자료엔 몇 백만 달러에서 몇 만 달러까지 예산 계획이 빼곡했다. 경제나 회계는 나랑 최악의 조합이다. 이틀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가족들이 하는 말을 모두 영어로 통역하며 발성기관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잘 들어야만 꼼꼼히 통역하니 메모는 필수다. 그리고 관련 경제 용어를 찾아 한국말로 통역 연습을 했다.


그걸 듣고 있던 딸아이의 한마디, '엄마, 한국말을 왜 이렇게 못하세요? 책 좀 읽으셔야겠어요!' 으아아아~악! 소파에 엎어졌다. 보내준 자료의 용어와 단락들을 한국말로 자연스럽게 발성하도록 호흡 조절을 하며 차분히 읽고 다시 또 읽으며 용어를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강약 조절을 하며 연습했다.


게다가 저 숫자들은... 숫자는 정확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고 치게 된다.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와야 입으로 제대로 나갈 수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엄마는 실전파니까 잘할 수 있어요, 고맙다, 딸!


아이는 나를 항상 흔든다. 그렇게 나를 새로 변하게 한다. 동기부여마저 해주는구나.


새벽을 뚫고 일찍이 회의장을 둘러봤다. 이런 회의에서는 순차 통역자의 자리가 중요하다. 보통은 당사자 사이에 앉아 메모하며 통역한다.


직원분들의 환대 속에 통역 자리에 안내받고 당황했다. 정작 통역해야 할 발표자 옆이 아닌 높은 분들의 중간 자리다. 담당자는 한국어로 발표하니 통역을 하면 되었지만 미국 위원들의 질문에는 높은 분들이 영어로 대답을 하니, 대각선으로 앉아있는 담당자에게 어떤 질문인지 답변인지 통역을 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역시 예산은 숫자라 날카로운 질문들이 오고 갔다. 구체적인 퍼센티지를 제시해야 하고 앞으로의 추산 금액과 지금까지 해온 예산 관습 등을 묻는데서, 대답하던 분이 움찔움찔 잘 못 알아들으신다. 이걸 어쩌나 하다가 영어 대화 사이에서 한국말로 설명을 잠깐 해드렸다. 제발 이 모든 과정들이 잘 끝나 승인이 나기를 바란다.


미국 위원 중 한 분이 내가 수첩을 어정쩡 들고 불편해하자 옆으로 들어가 앉으며 수첩을 책상 위에 놓고 하라고 배려해 주었다. 그런데 문 앞쪽의 직원들이 보기에는 내가 예의 없이 위원회의 책상을 차지하고 앉은 것처럼 볼 수도 있어서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이미 회의는 끝나가고 있었다. 


30분의 예산 심의 회의가 끝나자 기절할 것 같았다.

 


#라라크루 #라라라라이팅 (1-2) 까마귀와 글친구들의 응원 덕분에 잘 마쳤습니다.

사진 - 깊은 가을, 내가 행복한 에서 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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