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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Oct 26. 2023

아내, 엄마, 그리고 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그 후 내 삶은

저 여인의 옆모습처럼 아름답게, 내 시간에 머무르며 같이 눈 맞추는 사람들에 집중하고 싶다.




현실은 차갑고 아프고 다짐의 연속이다. 나는 매일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낯섦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단 한시도 같지 않은 하루, 항상 다르게 낯선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나의 칼날 같은 날카로움과 시시 때때 울다 웃는 감정으로 내가 아닌 사람들과 같이 산다는 게 참 신기하다.


'아빠, 엄마 이상해!'

'엄만 원래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게 오래 내 남자와 내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산다. 고용량 컴퓨터 중앙처리장치 같은 남자, 예민과 불안, 사랑과 열정 그대로인 아이, 그 둘이 나의 양 옆에서 나를 어루만지며 산다.


MBTI로 치자면 상극인 두 사람, ISTJ와 ENFP 사이에 내가 각각 두 개씩 공유하며 균형을 맞추며 사는 재미있는 가족 공동체다. 그렇지만 나는 Assertive, 둘은 Turbulent,  난 내 확신에 차 내 맘대로 살고, 둘은 주위에 민감해서 불안불안 나를 돌보며 산단다.


우린 정기적인 가족회의를 하며, 유언장을 시기에 맞춰 업데이트하고 있으며, 전쟁이 날 경우 행동 수칙까지 모두 문서화해 두었다.


 콧방귀 뀌면서, 따라가고 아이는 무척 심각해하면서 서명한다. 남편이 서명하라고 일러준 그 자리에 우리는 펜을 꾹꾹 눌러써가며 가족애를 다지는 중이다.


며칠 전에 보건소에 나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왔다. 직원이 진지하게 눈 맞추며 설명하는데 나는 오히려 가볍다. 의사 두 명이 연명의료가 무의미하다고 판단 후 시행된단다.


오늘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시스템에 등록되었다고 알림이 왔다. 이젠 어떤 의사도 내가 겪은 공포를 내 아이에게 쏟아붓지 않으리라.


아버지의 보라색 마지막 숨 앞에서 먼저 가시라 떠미는 듯 공황 속에 해야 했던 '연명의료 하지 않겠다'는 나의 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순간일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자연사하는 것이 제대로 안 되는 세상이 무섭다.




가끔 내 유품을 정리하는 상상을 하며 물건을 정리한다. 그러다 발견한 20여 년 전 회의록, 날것 그대로다. 나는 부끄럽다. 가만히 읽어보니 나의 불량스러운 생활과 서로 줄다리기로 받아낸 다짐들이 빼곡하다. 한바탕 웃는다.


커피 덜 마시고 소리 지르지 말고 남편에겐 뽀뽀와 주기적으로 같이 술 마시기, 아이에겐 꼭 밥을 주라는 내가 지켜야 할 사항에, 온전치 않은 마음으로 하루를 촘촘하게 나누어 바쁘게 살았던 시간들이 지나간다. 얼마나 예민했던가.


몸부림치며 했을 학원 숙제에 아이의 하루가 눈에 보이고, 남편은 TV 좀 그만 보고, 군것질과 빨래는 토요일에, 그리고 시 낭송을... 세상에! 시 낭송? 무슨 시였는지 하나도 생각나진 않는다. 우리 그랬구나.



그런 불완전한 나는 여전히 존경받으며 사랑받으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 아내를 따뜻하게 지탱해 주고, 엄마를 사랑한다 풀쩍 안기는 그런 가족들이 있으니 나는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마음껏 사랑하며 산다. 내가 지켜야 할 내 사람들, 내 세상이다.


이제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지 내 품을 더 많이 내주게 된다. 마음을 더 많이 보여주게 된다. 아내, 엄마, 나, 제대로 채워가야지. 제발 철이 다 들어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주고 떠나고 싶다.



그림 - 펜드로잉 by 희수공원 20231025

참고 자료 - 보건소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안내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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