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요, 무리하지는 마세요.’
뒤 따르는 그를 향해 미소를 밝게 보냈다. 내 목소리가 등산로 나무 사이로 흔들흔들 퍼져 나갔다. 그가 후다닥 나를 앞질러 가다가 뒤를 한번 돌아보며 쉬다가 다시 내 뒤로 뒤쳐졌다.
‘그래요, 그렇게 원하는 걸음 넓이만큼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예요. 잘하고 있어요’
한라산의 영실 등산로는 사계절 언제나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낮은 산자락을 휘돌며 경사가 없는 완만함을 즐기며 어렵지 않은데? 하고 느끼는 순간 꽤 가파른 흙길과 나무 계단이 앞을 막는다.
아이처럼 총총 가볍게 뛰며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다. 그의 등 한가운데를 기다란 햇빛이 통과하여 내게 닿는다. 투명하게 아름다운 모습이다.
고마워요, 그리고 아프지 마요. 내가 낫게 해 줄게요. 남벽이 낫게 해 줄 거예요.
방사선 치료 후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인공으로 만든 거대 통증 에너지를 품은 방사선이 몸속을 휘적거렸을 테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척추의 사악한 기생 조직을 태우며 써버린 쇠락한 그의 기운이 꽤 오랫동안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며 초췌한 모습을 보였다.
약해진 몸뚱이에 눈이 핑핑 돌아 힘없이 걷던 길에서 구토를 하고 그을린 검은 상처에서 벗겨져 나온 피부를 보면서도 슬퍼할 힘조차 없었다고 말했을 때, 내 가슴은 찢어졌다.
나쁜 조직을 조각내면서 주변의 좋은 조직도 죽인다고 했다. 나쁜 것들만 몰아낼 수는 없는 건가 보다. 말만 들어도 뜨거운 전쟁으로 힘겨운 그의 몸 안의 이야기였다.
조각난 나쁜 무리는 죽고 주위에서 같이 죽어야 했던 좋은 조직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악성 조직을 향해 방사선을 쏘는 것이 그 괴로운 치료다.
몸속의 조직도, 나쁜 것들은 벌 받고 좋은 것들은 선하게 다시 돌아오는 그들의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그의 아픈 몸이 내게 알려주었다.
소나무가 빽빽이 구불거리는 정원 같은 길을 지나면 눈앞에 넓게 펼쳐지는 낮은 구릉과 들판이 나타난다. 아주 저 멀리 남벽이 마중 나오는 것 같다.
오솔길로 길게 난 나무 길에서 그가 나를 지나간다. 하늘에 닿도록 깡충 뛰기도 하고 뒤돌아 걸으며 내게 손짓도 한다. 어서 와요.
‘천천히요, 무리하지는 마세요.’
왼쪽으로 난 전망대 길을 그가 한달음에 올라 어서 오라고 보챈다. 온 방향으로부터 낮은 들판을 거쳐 불어온 바람이 그를 감싼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는 거예요.
1,700미터, 윗세오름 표지석을 지나 올라가면 저 멀리 작은 뚜껑 같은 남벽의 옆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깊은 골짜기를 뛰어 내려갔다가 그 반동으로, 오를 수 있는 곳까지 튕겨 올라가면 남벽까지 쭉 이어진 나무 계단 길과 현무암 돌길이 다정하게 맞는다.
그의 의지를 읽는다. 생명을 다시 얻고 싶어요. 그렇게 외치는 듯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남벽 앞에 한 개 작은 산등성이를 남겨두고 꽤 큰 골짜기가 보인다. 눈이 왔다면, 바람에 떠밀려 소복하게 차있는 눈 때문에 얕게 보이겠지만, 따뜻한 기후 탓인지 눈이 없는 골짜기는 진한 회색과 갈색으로 움푹 깊다.
이파리 떨어진 나무와 초록을 뽐내는 소나무가 공생하는 그곳을 지나면 마지막 구릉을 헉헉대며 넘어야 한다. 왼쪽으로 항상 초록인 소나무가 빽빽하고 오른쪽으로 간간이 서귀포 시의 낮은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푸르다.
남벽 앞에 섰다.
그가 남벽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꿈쩍 않고 마주한 남벽의 큰 기운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미소 가득한 그의 투명한 얼굴을 통해 그 너머 등성이를 본다.
백록담으로 몰리는 사람들 속에 나는 남벽을 더 좋아한다. 늠름한 바위 이랑과 고랑들이 거대한 남벽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대동맥처럼 뻗쳐 오르는 그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남벽은 내가 서 있어야 할 마지막 목표다.
돌아오는 돈내코 숲길은 길게 길게 계속된다. 아무런 말 없이 걷는다. 그게 답이다. 때론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순조롭게 제대로 맞아 들어간다. 그냥 그렇게 오래 걸었다. 그도 걷는다.
하얀 그리스 해변의 집 같은 애월의 펜션은 내가 제주에 갈 때마다 묵는 곳이다. 이번에는 방 두 개의 독채를 얻었다. 그의 밤과 나의 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치유의 힘을 줄 것이다.
남벽을 뛰어 오른 그가 들어있는 방을 향해 잘 자라는 속 인사를 했다. 수고했어요. 그렇게 사는 거예요. 남벽이 당신을 살릴 겁니다.
세 벽면이 거울인 욕실에서 뿌연 스팀 안개를 만들며 샤워를 했다. 안개를 내보내는 환풍기의 날개가 더운 스팀을 밖으로 밀어내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몸이 거울에 비쳤다.
이상하게도 손이 보이지 않았다. 손을 거울 쪽으로 뻗었다. 남아있는 안개가 점점 더 타고 올라가며 손목을 감싸고 팔꿈치를 흔들며 내 팔 마저 흐리게 지우고 있었다.
아… 안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상한 꿈이다. 손이 뜨거웠다. 안도하며 다시 침대 시트로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꿈으로 다시 이어져 뜨거워진 손이 다 타버려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저 건너에 그가 자고 있을 것이다. 가만히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새벽 두 시 반, 집에서도 자다가 거의 항상 깨는 시간이다. 뭔가에 이끌리듯 그의 방 문을 열었다.
그가 하얗게 핏기 없는 얼굴로 누워 있었다. 숨 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를 내려다보다가 왼쪽 어깨 옆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뜨거운 손을 그의 왼쪽 가슴에 올렸다. 심장이 약하게 뛴다. 남벽 가는 길이 힘겨웠나 보구나.
왼쪽 폐는 내 손의 온기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당신의 통증을 내가 가져갈게요. 몸의 기운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용히 그의 옆에 누웠다.
‘천천히요, 무리하지는 마세요.’
이번에는 그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래요.’
제주 여행 이후 기운이 없었지만 마음은 새로 태어난 것처럼 가볍고 기뻤다. 그가 남벽을 맞게 되어 기뻤고 내가 그의 옆에 누워있을 수 있어서 가볍게 마친 여행이었다.
다음 날도 나는 7-3 전동차 입구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내게 걸어온다. 지친 기색이었지만 웃고 있었다.
“미안해요, 남벽에 같이 가고 싶었는데… 많이 아팠어요. 지난 새벽에 특히요.”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남벽이 당신과 같이 있었노라고 말없이 가만히 전해주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