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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Oct 23. 2024

화들짝 귀가

안심

에스뿌레쏘 2샷과 아메리카노 2샷을 차례로 눌렀다. 짧은 여행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새벽 6시, 그간 들렀던 화려하고 시끄러운 커다란 이름들이 잠에 빠져 있는 사이, 원두를 머리에 얹고 손님을 기다리는 근처 편의점으로 간다.


다시 만나요. 내 커피를 내리고도 토실하게 태운 콩들이 반쯤 차있는 이탈리아산 커피 머신에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새벽길을 되돌아온다. 하얀 텀블러에 커피를 길어 오다가 내려다본 까만 길 위에 '안심 귀갓길'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한달음 옆으로 피했다.


저 지금 안심하고 귀가하는 중인가요.


하얗게 번쩍거리는 커다란 글자들이 두려웠던가. 도대체 안심할 수 없는 이런저런 모퉁이를 지나다니며 의아해서 피했던 건가. 특정 성별이 떡 박혀있는 안심 귀갓길 위에서 살얼음처럼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우린 누구나 다 안심하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강조된 것들의 무방비와 보호받지 못하는 마음들을 길바닥에 따박따박 새겨두고 소리 지른다. '안심'에 집중하는 순간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다.


당신은 안전해요, 그러니까 제가 너, 바로 너를 지켜줄게요. 누가요? 길바닥이? 당신 누구야! 그거 알아 뭐 하시려고, 지켜 준다잖아.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지키는 거냐고요.


안심이라는 팻말이 서 있는 곳이 마치 우범지역인 듯 떠오르고, 제 성별은 이거예요 하면 다른 성별인가 보다 흘깃거리고, 원조가 붙은 곳에서 원조를 의심한다. 그런 심리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렇게까지 강조해야 하는 시간을 산다.


안심 귀갓길을 써 둔 곳과 멀어질수록 불안과 편안이라는 양면의 감정이 뒤섞인다. 안심 귀갓길과 멀어지고 있으니 불안하다. 그다음 안심 귀갓길은 얼마큼 가야 할까. 그 다섯 글자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안심이다.


흑백의 도드라진 시각적 자극에 안심을 둘러업고 불안하다가 내 안식처 앞에서 안심을 저 멀리 패대기치고 문을 걸어 잠갔다.


커피가 아직 뜨겁다. 안심이다.


오늘도 커피처럼 그렇게 뜨겁게 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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