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가을 그 어디쯤에서
좋은 글을 읽으며 마음의 눈을 뜬다. 마음의 찌꺼기를 걷어 올린다. 부끄러움을 가득 안고 되돌아보기도 하고 서성이는 그 자리에서 어디쯤까지 왔을까 오래 눈감고 머무르기도 한다. 마주하는 자신의 초상과 타인들이 보내는 메아리에 자신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다. 혼자 있어도 다가오는 빛과 그림자, 관계의 깊이를 생각한다.
아름다운 글을 마주하며 눈물이 난다. 가슴을 모두 뒤져 한 올씩 풀리며 드러나는 마음과 몸을 지켜보면서 울렁이는 색깔들을 기록해 둔다. 아, 어떡하지. 지금까지 충분했다고 느꼈던 시간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뒤통수가 한꺼번에 날아간 것 같은 공허가 마음을 휩쓴다. 우물 같이 깊은 글, 나 같은 텍스트 중독자의 양식이다.
거울이 되는 글을 읽으며 상처를 더듬는다. 상처라 생각했던 것들이 혼자만의 오만과 굳은살 같은 아집일 수 있다니. 어쩐지 하루 종일 고개를 떨구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간절함에 가만 멈추어 슬프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조차 불손한 손님처럼 낯설다.
가을은 어느새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읽게 한다. 깊어지고 싶다는 갈증이 금세 채워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글 속을 헤매고 말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런 익숙하지 않은 희열에 무작정 자신을 맡겨도 좋은 계절인가 보다. 가을의 끝에서 만난 좋은 글과 아름다운 글을 쓰는 작가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정갈한 글이 좋다.
겨울로 숨어 들어가다 잠시 선다. 겨울은 안도의 계절이다. 하얗게 잠이 들어 하나씩 세포를 고를 수 있는 차분한 그리고 차가운 시간이다. 동면의 양식들을 쌓아두고 긴 호흡을 위해 준비하며 진하고 깊은 가을이 남긴 낙엽 사이를 걷는다. 이런 충만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좋다. 황홀하다고까지 하면 너무 지나친 걸까.
마구 하던 일들에서 잠시 손을 떼고 폭풍처럼 쏟아내던 감정들을 다독인다. '타인을 통해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진 않은지 돌아보는 글을 읽으며 가눌 수 없이 출렁였다. 그 또한 겪어내야 자신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한다. 숱하게 읽어왔지만 나는 지금 전율한다. 많이 떨고 서 있었다, 꽤 오래.
겁을 낸다는 것은 인식을 위한 신호이며 그 시작이야 말로 성찰로 향하는 길이라는 커다란 위로에 단정하게 마음을 세운다. 초라하고 작게 한 점으로 남은 나의 자화상이다.
이게 다 가을 때문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