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부유

훨훨

by 희수공원

주둥이가 가는 검은 포트의 작은 틈으로 끓는 물방울이 튄다. 커피를 내리려다 레몬을 반으로 가른다. 아롱거리는 투명한 알맹이들이 윤기 나는 이마를 맞대고 이별하고 있다. 그렇게 사람들도 떠나간다. 그래야 한다.


어떤 인사도 하지 않아도 좋다. 방향이 정해지면 뚜벅뚜벅 가면 된다. 곧 만나자는 언약도 차가운 영하의 날씨에 얼음 알갱이로 떨어진다. 왜 만나자 했을까. 해가 다 저무는 언저리에서 잘가라 보낸다.


마음이 더 애틋하게 머물렀기에 각자 돌아서는 시간이 느리다. 지금의 자신을 더 충실하게 투영할 수 있는 그런 변화라 그렇다. 돌아가는 길, 너무 화려해서 너무 뜨거워서 너무 아파서 너무 비려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글을 쓰다가도 글을 읽다가도 머물 곳이 아니라면 일어서는 거다. 여럿에 이끌려 분위기에 휩쓸려 다른 사람들이 좋다는 곳에 낯설게 서 있다가도 언제든 발길을 돌리는 때가 온다는 걸 안다.


온갖 철학자와 고전 작가들의 그늘, 화려한 겉치레를 덮고 사는 가식과 지식의 전시에 헛헛하게 웃으면서도 조금은 인내하며 기다려 줄줄 아는 거다. 이제는 그만해야지 돌아서야지 할 때까지. 세상에 들지 못하고 세상을 보는 고독을 견뎌내야 한다.


투명한 컵에 끓는 물을 붓고 레몬을 움켜쥔다. 그렇게 집착하던 관계들이 뜨거운 물속으로 희석된다. 올해의 무게들이 시디 신 레몬 알갱이와 함께 툭툭 떨어지면 마음속에 여전한 응어리도 퍼져 나가며 따뜻한 아지랑이로 레몬티가 된다. 그런 게 사는 거다.


입술로 흘러드는 신맛의 농도만큼 관계들이 층층으로 쌓이며 시간을 채운다. 감사를 드리고 두려움을 올리고 손을 잡아주고 눈 속의 불안을 읽는다. 그럼에도 함께 했던 시간의 흔적들이 내일을 바라보게 한다. 다 그런 거라며 스스로 다독일 줄도 안다.


단단하게 마주 보며 보내는 연습을 한다. 서로 모자라했던 마음도 붙잡지 못했던 소매도 놓고, 그 간격만큼 비어진 자리는 어느새 조금 자라난 마음이 채운다. 새살만큼 쌓인 통증이래도 그만큼 깊어진 삶의 진중함에 기댄다.


향하고 마주하고 바라보고 잡아주고 움켜쥐었다가 손을 펴고 마음을 연다. 그런 게 관계라서 그런 게 서로를 허락하는 인연이고 자유라서, 지금이라도 그걸 깨닫는다는 건 어제보다 오늘, 마음이 조금 자랐다는 거다.


멀어진 메아리를 타고 오는 그 시간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고백들이 나란하고 마주했던 사람들의 순수가 여전할 것이다. 자신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빛이 삶을 여전히 지탱하게 할 것이다.


줄 수 있는 마음과 크게 벌릴 수 있는 가슴과 가만히 머물며 충만하게 보낼 시간을 위해 조용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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